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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계급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공개적 활동을 지속해 오던 사노위가 오랜 내홍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강령초안을 공개했다. 그간 혁명을 외치면서도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로 인식되는 당의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분할된 서클로만 존재해 오던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유의미한 당 건설 로드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사노위에 대한 사회 각 분야의 관심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뜨거웠고, 투쟁 현장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은 외곽의 사회주의 지지자들에게도 광범위한 흡입력을 행사했다. 이번 강령초안 공개는 이제까지의 활동을 내외에 걸쳐 확인하고 평가받을 가슴 떨리는 개막일 것이다. 한국 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 단계를 마련한 모든 동지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온 박수를 보낸다.

본인 역시 사노위에 가입은 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열심히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멀리서나마 지지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강령초안을 읽고 느낀 바를 간단히 적어 보고자 한다.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하지 않는 관념적 지지자로서 항상 가질 수밖에 없는 관념성에 대한 오류는 본인도 언제나 의식하고 있으며, 혹여나 글 안에서 그러한 오류가 발견된다면 기탄없는 지적을 부탁드린다. 그러나 동시에 조직과 현장에 함께하지 않는다 하여 한 명의 대중이 조심스레 내놓는 의견의 합리적 핵심까지 내치지는 않기를 또한 바란다.



1. 강령초안의 의의

이번 강령초안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 나아가 한국 민중 전체에 크나큰 의의를 가진다. 큰 틀에서는 무엇보다도 강령초안 그 자체가 하나의 의의이다. 서론에서도 말했지만 한국 혁사진영이 처음으로 당을 건설하기 위한 로드맵을 제시하고 그것의 현실성을 가시화시켰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향후 한국의 민중운동과 전체 정세에 새로운 장이 열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강령초안의 발표는 그러한 가시화된 현실성이 맺은 결실의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사노위는 조직 내외의 당 건설의 현실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실천적으로 반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번 강령초안의 의의는 그 내용에 있어 두 가지를 명시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혁명적 사회주의 당의 핵심을 이루는 것들로서, 이것들이 결여된 채 강령초안이 제출되었다면 오히려 한국 최초의 혁사당 건설이라는 큰 틀에서의 의의조차 훼손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내외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노위는 그 핵심을 빠뜨리지 않고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주었으며, 그로써 그 자신의 현실성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명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가 그것을 언급한 이래 지금까지 혁명적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부르주아 독재로 보고, 여기에서 계급철폐로 이행하기 위해 진정으로 혁명적인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는다는 전략은 마르크스 당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영향력을 가졌던 공상적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비현실성을 폭로하며 노동계급의 주체적 역할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토대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에 의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말 그대로 난도질을 당해야만 했다.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당의 독재로 타락해 간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 자체로 왜곡되었고, 무수한 서구의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앞다투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내팽개치고 거기에 침을 뱉었다. 이 개념은 현존 사회주의 실험 실패를 필연적으로 만든 논리적 근원으로까지 격하되었으며, 이것을 지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현실성은 살아있다. 자본주의는 알아서 붕괴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코 노동계급의 투쟁을 우회해서 철폐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가 남긴 수 천 년 동안의 계급지배 구조의 잔향은 한 방의 혁명으로 사라질만큼 허약하지도 않으며, 대중에 대한 계몽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폐절될 수 있는 관념의 산물도 아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떨쳐내기 위해서 우리는 단호하게 노동계급과 함께 부르주아로부터 권력을 탈취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사노위 강령초안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명시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첫째, 당의 정치적 원칙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시함으로써 그것을 단순히 학문적 개념에서 정치적 쟁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인 사노위와 만나는 노동대중은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쟁점으로 이끌려 들어오게 되고, 이것은 박제화된 개념에 새로운 대중적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둘째, 당의 대원칙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확립됨으로써 당의 모든 정치적 결정에 혁명적 방향성을 부여할 수 있다. 어설프게 대중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핵심적인 원칙을 숨기는 세력은 언제나 대중은 속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속아 넘어가게 마련이다. 혁명적 핵심이 원칙으로 서 있는 한 비혁명적/반혁명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선택의 입지는 좁아진다. 이는 당의 계급성을 선명히 함과 동시에 당의 정치적 전망을 일관되게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셋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천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주체화를 이루어낼 유일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계급권력이 실재하는 현실에서 지배계급의 독재에 대항한 대항독재를 구상하지 않고서는 결코 대중을 주체로 만들 수 없다. 왜냐면 주체란 정의상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는 자이며, 이 자결권은 권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계급지배의 권력이란 그 자체로 독재적이며, 따라서 대항독재의 현실적 현상형태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에게 권력을 주어 주체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만약 이 개념을 우회한다면 노동계급은 언제까지고 부르주아 독재의 객체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진정한 인민주권의 선결조건이다.

사노위 강령초안은 이러한 의의를 전취함으로써 유의미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세력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나. 이행기 요구의 명시

트로츠키의 이행강령 논의에서 시작한 '이행기 요구'라는 논점은 현대 혁명당에 있어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점차 무르익어 가는 구조적 조건과 이와 유리되어 있는 주관적 조건 사이의 괴리에 대한 인식은 트로츠키가 목도한 20세기 초 파시즘의 형태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이 괴리를 계몽주의적이지 않고 진정 혁명적인 방식으로 뛰어넘기 위한 '목숨을 건 도약'으로서 이행기 요구는 배치된다. 사노위는 강령초안에서 이러한 역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행기 요구는 그 자체로써 사회주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경향인 우편향과 좌편향에 대한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 구조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의 괴리 사이에서 우편향에 빠진 자들은 주관적 조건으로의 후퇴를 외치며, 좌편향에 빠진 자들은 구조적 조건으로의 맹돌을 시도한다. 그러나 전략과 전술의 유기적 배치가 결여된 최소주의와 최대주의는 모두 파멸할 수밖에 없다. 전자는 무르익은 구조적 조건이 올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고 폭주함으로써 나타나는 야만적인 반동을 통해 분쇄될 것이며, 후자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한줌의 모험가들로 고립되어 포위섬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 이행기 요구는 주관적 조건을 구조적 조건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실천적 로드맵을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편향을 극복한다.

따라서 이행기 요구를 명시하느냐 마느냐는 단순히 정치공학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혁명당이 혁명적 원칙의 현실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노위는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이행기 요구를 강령초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이후의 실천에 있어 하나의 로드맵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노동계급과 유리되어 관념으로서의 사회주의에 취해 있는 집단이 아니라 대중의 존재와 의식 속으로 침투할 준비가 된 실천적 당임을 입증했다.



2. 강령초안의 문제점

그러나 강령초안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강령의 본질과 그 기능의 완성도에 있어 주요한 결함이 될만한 한계가 눈에 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점이 기본적인 강령초안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개중에는 전적으로 주체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만은 없는 부분도 내포되어 있다. 게다가 이 글을 쓰는 본인 역시 문제점을 지적할 수만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할 말이 궁색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올바른 답보다는 올바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있듯이, 부족한 본인의 사견이라도 올바른 문제로 귀결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조심스레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해 보겠다.


가. 현 시기 체제 분석에 있어서의 문제점

강령초안은 1장에서 현 시기 자본주의 체제에 관해 논하고 있다. 각 하위 항목에선 일단 첫째로 자본주의 체제의 일반론적인 문제점을 열거하고, 둘째로 현 시기 자본주의의 야만적 현상형태와 그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세계적 저항의 흐름을 추적하며, 마지막으로 한국에 적용된 자본주의 모순의 현상형태를 분석한다. 당의 강령이라는 것이 단순히 공상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하여 전략을 제시하는 것인 한, 강령의 대전제로서 이러한 현실 분석이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노동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당으로서 궁극적인 타격 대상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로 명시한 것 역시 필연적이면서도 또한 필수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것만으로 충분하냐는데 있다. 만약 우리가 19세기부터 반복되어 온 자본주의에 대한 당위적 비난에 천착하여 '선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라면 이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체제의 비합리성을 소리높여 외치고, 그 비합리성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기초로 투쟁하는 유물론자들일 것이다(설마 아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자본주의가 이렇게 나쁘다고 선언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메커니즘이 현 시기 어떻게 관철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 약한 고리가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 우리의 약한 고리를 공격해 오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제출할 필요가 있다. 즉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체제 분석을 넘어선 레짐 분석이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자면, 강령초안에서 당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가 가치법칙의 작동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주요 전략이 무엇인지, 자본 분파 내 가치 재분배 과정은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세계 각 지역은 어떤 관계를 맺어 그 과정을 구현하고 있는지, 여기까지의 일관된 논리 속에서 한국의 위상과 역할 및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낮은 추상 수준에 대한 해명이 없이, 최고 추상 수준인 체제에 관한 논의로부터 곧바로 구체적인 당면 현실에 대한 답을 도출한다는 것은 변증법적 체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이러한 비판을 곡해해서 받아들이지 않길 바란다. 본인은 여기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한계나 착취법칙의 불변성을 의문에 부치고자 함이 아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 당시(마르크스 당시, 혹은 러시아 혁명 당시)의 자본주의와 다르다"로 시작하는 여러 유사-개량주의를 논하고자 함도 아니다. 본인은 다만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보여준 작업의 재현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보편적 본질에 대한 명료한 인식에 기초한다 하더라도, 그 특수한 형태에 대한 인식 역시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약한 고리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이 없이는 당의 전략도 상황에 맞춘 우연성의 돌출일 수밖에 없고,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 없이는 계급대중이 체감하는 매일의 현실에 대해 틀에 박힌 잿빛의 설교밖에 할 수 없다. 당은 이래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 모든 책임을 투쟁 주체들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89년 소련 붕괴 이후 정체되고 관념화된 '좌익 인텔리' 그룹의 책임이 훨씬 결정적이다. 그들이 계급적 관점과의 연계를 폐기해 버린 지금, 사실상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과 80년대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이후 유의미한 레짐 분석의 단초는 전혀 제출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 투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바쁜 동지들에게 되는 대로 이것저것 아무거나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본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굳이 논하는 이유는 첫째, 완성된 형태의 분석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부분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과, 둘째, 체제에 대한 통합적인 관점을 당의 구체적인 전략으로 매개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인만큼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어긋날수록 당내 분열과 논쟁이 심각해질 수 있으니 미리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입장을 통일시켜 갈 준비를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나. 현실사회주의 평가에 있어서의 문제점

21세기 혁명적 사회주의 헤게모니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한때 고귀한 이상을 품었던 자들이 남긴 가장 끔찍한 유산이라는 점에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강령초안은 현실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냉정하게 인정하면서,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규정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한다. 분명 무난하고 필연적인 논리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리 전개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현실사회주의 실패의 원인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구조적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침은 매우 의지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전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건 극복방안도 아니고 제대로 된 답도 아니다. 그냥 적당히 누구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얘기일 뿐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현실사회주의 실패의 원인을 규정하는 부분에서 가장 먼저 강령초안은 이렇게 말한다. "...소련은... 유럽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조건, 낮은 생산력과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 노동자계급 내 선진층이 타격받는 주체역량의 손실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했다." 분명 맞는 말이다. 이어지는 논리도 훌륭하다. "이런 난관 속에서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는 무력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의 직접정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변질, 파괴되었다." "소비에트의 무력화와 당/국가관료층의 지배층(계급)화와 맞물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배정당으로 변질되었다." 분명 20세기 초 소련이 처했던 구조적 요인에서 귀결되는 실패의 과정을 잘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안이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권력(평의회권력)의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인가? 초기 소련 혁명가들이 그걸 몰라서 실패했던 것인가? 분명 위에서는 소비에트가 무력화된 조건에 대해 논하지 않았는가?

세계혁명이라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련이 "유럽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조건"에 처해 있었음을 분명 인식하고 있으면서 "'세계혁명의 관점─노동자 국제주의'에 바탕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다."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초기 소련 혁명가들이 세계혁명의 관점을 몰랐나? 세계혁명의 관점을 고수하고 있으면 세계혁명이 실패하지 않는가? 생산력주의 극복 문제는 또 어떤가?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가 일어나도 우리는 생산력주의를 극복한다는 말만 외치고 있을 텐가?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강령초안을 제출한 당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이건 기본적인 논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실패에 짓눌려 있는 계급대중의 신뢰감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다. 세계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와 노동자계급 내 선진층이 타격받는 주체역량의 손실 같은 조건은 러시아 혁명에 고유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혁명에서든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조건이다. 만약 이런 조건이 있어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조건을 극복할 방법을 얘기해야 하고, 혹은 이런 조건이 이제는 생기지 않는다고 본다면 왜 그러는지, 이런 조건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쓰겠다면 어떻게 손을 쓸 것인지를 논했어야 한다. "이런 훌륭한 원칙을 세우겠습니다"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 이행기 요구에 있어서의 문제점

위에서 강령초안의 의의에 대해 논하면서 이행기 요구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으나, 구체적으로 보면 현재의 이행기 강령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강령초안에 제출되어 있는 이행기 요구의 구체적인 요구 각각은 매우 적절하며,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사회주의자와 당이 반드시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하는 것들이다. 본인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들이 배치되어 있는 논리적인 구조의 문제다.

이렇게 얘기해 보자. 이행기 요구와 최소강령은 어떻게 다른가? 이행기 요구를 배치하면서 분명 당은 최소강령이 이행기 요구와 달리 개량적인 것임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행기 요구는 무엇이 다르길래 개량적이지 않단 말인가? 물론 답은 나와 있다. 개량주의자들의 최소강령과 달리 이행기 요구는 자본주의 철폐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건설이라는 큰 틀의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된다. 즉 이행기 요구는 그 자체로서도 물론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만, 그 이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하나의 전술적 경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강령초안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의 요구는... 투쟁요구(정책대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제출된 이행기 요구의 실제 형태는 그렇지 않다. 사실 (8) 노동자 통제 하의 몰수 국유화, (11) 자본가 폭력에 맞선 정당방위, (12) 총(대중)파업과 민중봉기, (13) 평의회에 기반한 노동자 직접권력 이 네 항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여느 진보정당이나 급진주의 정당의 최소강령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일까?

그것은 이 이행기 요구들이 "어떻게 노동계급과 함께 권력획득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제기 속에서 하나의 일관성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령초안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행기 요구를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지만, 각 요구는 그저 목록으로 만들어져 나열되고 있을 뿐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로서 유기적으로 배치되고 있지 않다. 이행기 요구로 제출된 각 영역이 어떻게 노동계급을 권력주체로 재편성할 수 있을 것이며,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 과정에서 어떻게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동시에 어떻게 적들의 약한 고리를 타격할 것인지, 이에 대한 해명이라는 논리적 흐름 속에 각 구호가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지금의 이행기 요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행기 요구라기보단 당면 현상에 대한 즉자적 구호라는 인상이 짙은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내용적으로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맞다면, 그것을 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전략적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지 그걸 꼭 강령에 그럴싸한 논리로 풀어써야 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반박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이행기 요구에 대한 투쟁과 전략적 관점의 헤게모니 투쟁을 분리시킴으로써 당의 활동을 불구화시킬 우려가 있다. 우리가 이행기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그 각각의 투쟁을 어떻게 전체 전략적 목표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그때의 투쟁을 일단 이기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전망이 소실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행기 요구는 단순히 요구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구체적 삶과 계급의 전략적 목표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연결고리로서 제대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선 그 사이를 매개하는 활동가들 자신이 우선 그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선 우리의 이행기 요구에 있어 '혁명으로 가는 로드맵'이라는 위상을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



3. 결론을 대신하여

이로써 간단하게 사노위 강령초안에 대한 본인의 감상을 정리해 보았다. 개중에는 격하게 찬양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수준 이하라고 비난하고 싶은 것도 있었으나, 본인 자신이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떠들 자격이 있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레 정리했다. 본문 중에 사실관계가 다른 것이나 잘못된 이해에 기초한 내용이 있다면 모두 본인의 불철저함에서 비롯된 것이니 기탄 없이 지적해 주되, 불철저하게나마 열심히 이해하고자 했던 시도만큼은 기껍게 봐주길 부탁드린다.

이러니 저러니 굉장히 많은 말을 했지만, 뭐가 어찌됐건 지금 사노위의 전진이 한국의 모든 혁명적 사회주의자 및 그 지지자들에 있어 극도로 중요한 한 걸음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진정한 노동계급의 당을 건설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동지들에게 본인의 거친 감상이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혹여나 몇 가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동지들의 투쟁의 의미를 깎아내리지는 않을 것이며, 앞으로 그것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면 오히려 더 강고한 당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비록 함께 싸우고 있지는 않지만 이 땅 어디에선가 노동계급 권력을 위해 헌신하고 있을 모든 이에 대한 지지의 뜻을 전하며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건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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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위 자유게시판에 직접 올라가는 글이라 말투가 이렇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잉여좌파
0. 序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재보궐 선거가 드디어 끝이 났다. 무소속이자 야권 통합 후보로서 상당한 바람을 일으킨 박원순은 결국 그 바람을 타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데 성공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반대투표로부터 안철수 신드롬, 나꼼수 열풍 등을 거쳐 여기까지 온 소위 '민주개혁세력'들은 지금쯤 오랜만의 승리에 한껏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의 종료가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한 후보의 승리에 그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가시적인 몇몇 명망가들의 말잔치와 제스처의 기저에 깔린, 보다 본질적인 정치적 흐름의 연장선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의 승리는 그 흐름의 정치적 중요성과 생명력을 입증하는 하나의 중간결산에 불과하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에서 박원순의 승리가 입증한, 2011년 하반기를 지배했던 정치적 흐름의 본질적인 의미를 규정하고, 이에 근거해 그 의의와 앞으로의 영향, 향후 전망과 좌파의 대응에 대해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아직 사태의 전말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시도되는 초벌적 논의이니만큼, 본문의 분석과 예측에는 실제와 다른 점이나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필자 자신에게 있으며, 기탄없는 지적과 반박을 바란다.



1. 2011 하반기의 계급정치: 중산층 정치의 재도약


2011년은 현 정권에게 있어 악몽같은 해이다. 반값 등록금 운동으로 피어오른 소위 '반MB' 경향의 불씨는 지난 2008년 촛불정국 이후 다시 한번 자칭 '민주개혁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다. 관악, 명동, 강정, 영도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의 불씨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성장한 반MB 불길은 여름 서울을 강타한 대홍수로 다시 한 번 탄력을 받았고, 이에 연달아 터진 무상급식 논란은 결국 서울시장 재보선으로 이어졌다.

이상의 흐름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상 2011년의 주요 정치적 사건과 흐름은 일관된 하나의 흐름 속에 포섭되어 있다. '반MB'라는 단순한 구호로 대표되는, 현 정권과 집권여당 및 그 기반 세력에 대한 반감에 기초한 대항 세력의 결집 및 주도권 획득이다. 그렇다면 이 대항 세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선거가 끝난 지금, 사람들은 20~40대의 박원순에 대한 높은 지지율과 단 4개 구를 제외한 모든 구에서 나타난 박원순의 우위 등을 들어, 그 기반이 '범국민적'이었다거나 '시민'이었다거나, 혹은 '세대투표'라거나 하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원순 당선으로 한 차례 매듭을 지은 이 대항 세력 결집의 정체는 결코 국민도, 시민도, 특정 세대도 아니다. 현 시기 급성장하고 있는 이 흐름은 다름아닌 중산층 정치의 재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역들은 다름아닌 도시 신 중간계급, 즉 대기업의 중견관리직, 의사/교사/변호사 등의 전문직, 중상급 공무원, 중간계급 이상 계층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자영업자 등이다.

어떻게 하여 그렇게 볼 수 있는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근래의 정세를 검토해 보자. 반값 등록금, 비정규직, 철거, 대홍수, 무상급식 등의 의제는 모두 현 집권 세력의 무능함과 반민중적 성격을 명백히 폭로하는 의제였음에 틀림없다. 이 의제들의 확장은 분명 집권 세력과 지배계급의 도덕적 헤게모니를 뒤흔드는 데 기여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대중적인 조롱 - 오세이돈, 전지적 가카시점, 실질적 승리 등 - 의 언술이다. 게다가 유럽발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한국의 부르주아 지배체제에도 균열을 발생시켰다. 2008년 하반기부터 2010년까지 후퇴를 강요받았던 민중운동 및 계급투쟁 전선도 올해 들어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전국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요구와 갈등은 지배계급의 무능을 지속적으로 폭로했고, 한국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계급을 대표할 수 있는 선도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상실이 자동적으로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 확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불황기의 노동자 계급 운동은 방어적으로 짜여지는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며, 이는 현재 한국에서도 과거 확보했던 단체교섭권이나 노동조건, 고용 안정성을 '지키려는' 운동이 주를 이루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피지배 계급도 적극적으로 헤게모니를 확장할 수 없으며, 대항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의제들은 하나의 자기 긍정적 로드맵이 아닌, 파편화된 부정적 언술의 총합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이 중산층 정치이다. 기본계급 양쪽의 힘이 모두 충분하지 못해 나가떨어져 있을 때, 이 하이에나 같은 무리는 잽싸게 주인 잃은 왕홀을 가로챈다. 과거 노무현 열풍으로 그 존재를 각인시키고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등장했으나, 이후 대선 패배와 2008 촛불정국의 패배로 한풀 꺾였던, 이 프티 부르주아 계급의 현대적 핵심이 다시 재기하게 된 것이다.

이 자립성 없는 계층에게 그들 자신의 것으로 주어진 것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작고 유아적(惟我的)인 세계뿐이다. 부르주아의 강철 통치 하에서 자신들의 작은 토끼굴 같은 터전을 위협받는 그들은 힘빠진 지배계급을 맹렬히 물어뜯는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터전이자 세계 그 자체인 그 작은 토끼굴을 절대화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것을 위협하는 행태에 대한 공격은 다른 무엇보다도 도덕적 비판으로 나타난다. 허나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이 계급은 스스로 자기 계급의 대중운동을 건설하기보단, 누군가 가만히 있는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대변해주길 원한다. 이상의 특징들이 중산층 정치의 핵심적인 요소를 구성하게 된다.



2. 현 시기 재도약의 특징과 이전 시기의 부르주아 정치와의 차이점


이러한 중산층들의 결집은 자신들의 유아성과 개인성을 동시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언술 및 개인의 등장으로 촉발된다. 안타깝게도, 이들에게 필요한 그 언술을 제공한 주체는 다름아닌 민중운동 진영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상대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퇴기에 놓인 노동자 계급은 파편화된 부정적 언술을 통해 자신을 방어한다. 이 언술의 특징은 자신의 독자적 가치를 긍정함보다 보편적 가치에서 배제됨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후퇴기에 노동자 계급이 공격받는 영역이 갖는 보편성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타당하고 또 일견 효과적이지만, 보편성의 요구는 대항 주체의 범주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에 따라 그 언술의 형태도 보편성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지배계급의 비도덕성이 전면에 배치되게 된다. 이 모호성의 빈 자리에 약삭빠르게 끼어들어오는 것이 바로 중간계급이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에 의해 폭로된 지배계급의 비도덕성을 전유하여 자신들의 도덕적 언어 체계를 확장한다. 이러한 언어 체계는 중간계급의 문화적 아비투스에 의해 두 모순적인 갈래로 표출되는데, 하나는 자신들의 개별적 도덕성을 공허한 미사여구로 과시하고 공유하는 스노비즘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자신 이외의 도덕적 파탄을 저속하면서도 휘발성 강한 비속어로 조롱하며 즐기는 키치즘의 형태로 드러난다. 중산층의 스노비즘과 키치즘은 동전의 양면이며, 둘 모두 자기 세계의 절대성에 대한 유아적 확신과 집합적 사상의 결여에 기초해 있다. 인터넷과 SNS에서 안철수와 박원순을 찬양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고상한 어투로 정의를 부르짖다가 돌연 반대파에 대한 욕설과 수준 낮은 조롱에 몰두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또 사회의 기본계급이 아닌 이들은 계급적 독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들만의 정치 세력을 건설/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 없음을 메꾸고 은폐하기 위해 개인 숭배가 이루어진다. 새로이 등장한 정치 아이돌에 대한 숭배와 간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광적이었고, 안철수와 박원순은 그 자신들의 고매한 도덕성에 의거해 '한줌의 꼴통들을 제외한 모두'를 '대리'할 수 있는 구원자로 호명되었다.

이러한 중산층 중심의 정치적 결집은 안정된 부르주아 지배와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째, 부르주아 지배는 노동자 계급 정치를 억압하고 그 위에 군림하지만 중산층 정치는 노동자 계급 정치를 전유하고 기만한다. 왜냐면 앞서 언급했듯이 중간계급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추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번 흐름을 타면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도 있지만, 실제 국가를 움직이기 위한 추동력을 얻기 위해선 끊임없이 민중에게 구걸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시기 노동자 계급 정치는 반격과 사수의 전술보다도 의제 설정 주도권에 더 집중해야 한다.

둘째, 부르주아 지배는 자본주의 체제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움직이지만 중산층 정치는 파괴적인 불안정성을 불러온다. 부르주아 지배의 근간은 자본주의 체제의 법칙적 작동에 있지만 중산층 정치는 거꾸로 그 법칙의 교란에 지배의 근간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적이고 단일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중간계급은 끊임없이 두 기본계급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러한 중간계급이 레짐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진동 자체가 영속화하고 제도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을 강제하는 단일한 대중적 기반도, 자기 긍정적 원칙도 없는 이들은 그때그때의 임기응변과 공허한 선언에 휩쓸려 다닌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어디에서나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것은 당선 이후 현재까지의 오바마 미 행정부의 행태만 검토해도 일목요연한 점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산층 정치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에 속해 있으며, 아무리 입으로는 지배계급을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결국 지배계급을 강화하는 경향성을 띠게 된다. 그들의 무능함은 그들 자신의 지배를 가능케 한 자본주의 교란이 불러오는 다른 문제들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게 하며, 따라서 그들은 그 해결을 위해 다시 부르주아에 기대기 때문이다.



3. 현 시기에 있어서 중산층 정치가 구성된 구체적 형태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토대로 다시 구체적인 면면을 살펴보자. 박원순의 승리에 연결된 현실에서의 흐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안철수/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정치 아이돌의 등장, '나꼼수'를 중심으로 한 스노비즘과 키치즘의 유통, 기존 정치세력의 재편을 통한 대리주의 지원 기지의 형성.

안철수/박원순이 정치 아이돌로 부상하면서 짊어진 중간계급의 욕망은 '유능한 성군'에 대한 욕망이다. 과거 노무현 정권을 통해 한 번 몰락을 경험한 중간계급은 더이상 무능한 성군은 통용되지 않음을 학습했다. 물론 여기서의 유능/무능이란 자본주의적으로 형성된 개념인데,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 '부르주아적' 형태와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 자본의 화신으로 표상하는 부르주아의 유능함이란 냉정한 결단과 이윤의 극대화에 있지만, 자기 가정보다 더 큰 세계는 알지 못하는 이 동굴쥐 계급에게 있어 유능함이란 바로 아버지로서의 유능함, 가장으로서의 유능함에 다름 아니다. 즉 안철수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중간계급의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번 동시에 그 돈을 자기 식구들에게 잘 나눠주었고 나아가 아이들에게 모범적이고 존경받는 아버지로서도 행동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적 모델링은 곳곳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데, 예를 들어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가족을 부양하고자 하는 노력을 모르고 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자식은 '후레자식'으로 호명된다. 가족적 세계관의 틀 내에선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서로간의 믿음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모는 선거운동 기간 박원순을 비판하는 좌파들에 대한 맹렬한 물어뜯기로 주로 드러났는데, 장기적으로 이 경향이 집권까지 갔을 경우 이것은 더 파괴적인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 전국 재보궐 선거에서 보면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을 제외한 나머지 선거구에선 여당이 대부분 승리했다는 것인데, 이는 지방의 후진성이나 고연령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 정치인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중산층 정치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면 스타 정치인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 중간계급의 '대표성', 즉 스스로 이 정치체 내에서 보편성을 담지함을 주장할 수 있는 환상의 근거를 받쳐주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젊은이들과 서민들이 던진 박원순에 대한 지지는 사실상 4~50대 중산층이 제작/유포한 박원순의 환상적 보편성에 대한 지지이다. 중산층 그 자신에게는 결코 이러한 보편성을 환상적으로나마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대리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나꼼수'가 대표하는 스노비즘과 키치즘의 대량 유통은, 그 근거가 불안한 중간계급 헤게모니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재승인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이 방송에서 출연진은 계속 욕을 입에 올리며 소위 '꼴통'들의 지성과 도덕성의 결여를 조롱하는데, 이처럼 가벼운 형태로 대량 생산된 저속함이야말로 키치의 핵심 요소이다. 이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하층계급의 저속함과 구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어 걸쳐지는 액세서리로서의 저속함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키치즘은 스노비즘에 딸린 액세서리가 된다. '나꼼수'를 소비하는 중산층은 감자칩 같은 자극적인 언사들을 들으며 그 언사의 대상과 언사 자체의 저속함을 동일시하고, 그를 통해 대비적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확인한다. 즉 누군가 그를 개새끼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개새끼라는 말의 저속함에 어울릴만한 저속한 인간이란 뜻이고 그것은 나와의 수준 차이를 드러내 준다는, 실로 스노비즘적 자의식이 작동하는 대표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개인 숭배와 도덕주의 확산을 통해서만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데, 이 제도권 권력으로의 가교 역할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소위 '범야권', 즉 기존 정치세력이다. 새로운 중간계급 운동은 기존 정치세력을 입맛대로 재편했는데,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민주당의 당내 재편이다. 민주당이 올해 들어 부쩍 진보진영과 민중진영에 러브콜을 늘리고, 정동영이 이곳 저곳을 쑤시고 돌아다니는 것은 결코 단순한 정치공학적 계산도 주체의 주관적 결정도 아니다. 본디 하층 부르주아와 중상층 프티 부르주아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던 당내에서 정치적 주도권이 후자로 넘어가는 과정의 필연적 귀결이다. 완전한 부르주아 정당도 프티 부르주아 정당도 아닌 민주당의 모호한 스탠스는 그들의 모순적 행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주도권 경쟁이 이루어져도 결코 한쪽이 당내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인데,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무능함에 직면했을 때 다시 부르주아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도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진보정당 진영의 재편이다. 민중진영에서 전유한 도덕적 언사를 이용해 결집한 중산층 세력은 손쉽게 진보정당의 도덕성 자체까지도 전유했다. 진보정당들이 제도권 정치에서 자신들을 보수정당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던 유일한 언어 체계를 탈취당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당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독자적인 기반으로서의 민중운동에 대한 유기적인 결합력이 부재할 경우 더더욱 그렇다. 사실 민중운동 부문과의 유기성이 없는 진보정당이란 애초부터 하층 프티 부르주아 중심의 정당이자 도덕정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대 진보정당의 박원순 선대위 참여와, 당선 이후 범야권 통합론의 확산 등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재편을 통해 중산층 정치는 자신들을 대리해줄 누군가를 이중 삼중으로 쌓아올린다.



4. 結


이쯤에서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1 하반기 계급정치 정세에서 나타나는 흐름은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일보후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방어적 스탠스, 그 사이에 끼어들어온 신 중간계급 헤게모니의 재도약.

향후 정세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제아무리 고명한 정치학자라도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지만, 많은 오류의 여지를 인정하며 개인적인 전망을 밝히자면 이렇다. 이번 박원순 당선을 통해 중산층의 결집은 유례 없이 강고해졌고, 이 결집이 확산시키고 있는 헤게모니는 분명 단시간 내에 무너지진 않는다. 내년 하반기까지 큰 스캔들이 터지지 않는 이상 정세는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그때까지 모든 정치적 결정이 중간계급의 입맛에 맞게 이루어질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상 여전히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 있는 부르주아 세력을 실시간으로 끌어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재도약을 통해 형성된 세력이 큰 굴곡 없이 강화 일로를 걷게 될 것이며 여론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번 박원순 선대위에 참여한 진보정당들은 원칙을 저버린 야합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주도권이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간 이상, 이 헤게모니가 완전 붕괴할 때까지 진보정당들은 이 세력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진보정당만의 독자적 도덕 언술 체계는 사실상 소멸했으며, 중산층 정치를 우회한 대중적 정당운동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진보신당의 경우 새로 대표 후보에 출마한 홍세화를 중심으로 일신이 가능할지 주목되긴 하나, 이 역시 내적 일신에 역량이 소모될 것이며 진보정당운동 전체는 10년 전으로 후퇴함이 거의 필연적이다.

2012 하반기까지 중산층 결집을 붕괴시킬 큰 도덕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보면 다음 대선까지도 대세는 거의 넘어왔다고 볼 수 있다. 현 집권세력은 아마 그 도덕적 위기를 불러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덕적 위기가 실제로 찾아오거나, 혹은 이후 그들이 형성할 후속 전선에서 주요한 정치적 패배를 맞을 경우 이 결집은 형성될 때보다 더 빠르게 붕괴할 수 있다. 이 붕괴의 시점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겠느냐, 어떤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도 노동자 계급 정치에 있어선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후 좌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독자적 계급투쟁 전선의 강화. 둘째, 지성주의와 노동자 계급 언술 체계의 확장. 셋째, 확고한 당 건설 사업의 가시화. 첫째와 셋째에 해당하는 내용은 굳이 외부의 지지자일 뿐인 필자가 언급하지 않아도 현장의 활동가들이 더 잘 알 부분이라 생략하겠다. 둘째 내용만 조금 부연하자면, 일단 현재 노동자 계급 정치의 방어적 전술을 구성하는 도덕적 언술을 전술에서 배제할 필요가 있다. 아직 힘이 충분치 않은 노동자 계급을 기존의 권위로 쉽게 압도하는 중간계급의 스노비즘과 키치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양면 언술 체계가 필요하다. 그것은 공허한 스노비즘의 정체를 까발리는 지성주의적 언술과, 상품으로서의 저속함에 대립하는 삶으로서의 저속함을 담은 노동자 계급 언술이다. 전자를 보다 세련되고 치밀하게, 후자를 보다 친밀감 있고 호소력 있게 다듬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중간계급 헤게모니가 결코 짧지도 않지만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혹시나 그들이 집권이라도 하거나 다수 당이라도 된다면 그들의 몰락은 필연적이다. 책임지지 않는 위치에 있을 때 가장 활발한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 몇 번씩 비판을 반복해가며 역량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실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가 할 일을 그저 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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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잉여좌파
권리주체와 주권의 형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치이론: 상품형태의 전개와 화폐상품의 등장을 중심으로

1. 서론

   1.1.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의 연구동향 - 국가이론 vs. 이데올로기론
   1.2. 마르크스 정치이론의 연구동향 - 자유주의 비판
   1.3. 연구과제 제시 -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에 내재한 정치적 차원의 재조명 필요

2. 상품교환과 권리주체의 형성

   2.1. 자본주의의 기본 단위로서의 상품과 그에 대응하는 사회적 형태로서의 상품소유자
   2.2. 인간과 물(物)의 대립으로부터 연역되는 권리주체로서의 상품소유자

3. 상품형태의 전개와 정치사회의 형성

   3.1. 상품형태의 전개에 대응하는 상품소유자의 사회 형성 과정
   3.2. 전개된 상품형태에서 나타나는 사회계약의 개념
   3.3. 다수의 권리주체로 이루어진 부르주아적 정치사회의 형성

4. 화폐상품의 등장과 주권의 형성

   4.1. 전개된 상품형태에서 화폐상품으로의 이행
   4.2. 상품소유자에서 화폐소유자로, 권리주체에서 주권자로의 이행


5. 결론

   5.1. 요약 - 마르크스의 부르주아 정치사회 분석은 상품형태의 전개에 대응하는 상품소유자의 사회적 관계 확장에서 찾을 수 있음
   5.2. 향후 연구를 위한 제언 - 상품형태 전개의 다음 단계인 가치이론에 내재한 계급형성 분석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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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잉여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