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계급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공개적 활동을 지속해 오던 사노위가 오랜 내홍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강령초안을 공개했다. 그간 혁명을 외치면서도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로 인식되는 당의 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분할된 서클로만 존재해 오던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유의미한 당 건설 로드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사노위에 대한 사회 각 분야의 관심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뜨거웠고, 투쟁 현장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은 외곽의 사회주의 지지자들에게도 광범위한 흡입력을 행사했다. 이번 강령초안 공개는 이제까지의 활동을 내외에 걸쳐 확인하고 평가받을 가슴 떨리는 개막일 것이다. 한국 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 단계를 마련한 모든 동지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온 박수를 보낸다.
본인 역시 사노위에 가입은 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열심히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멀리서나마 지지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강령초안을 읽고 느낀 바를 간단히 적어 보고자 한다.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하지 않는 관념적 지지자로서 항상 가질 수밖에 없는 관념성에 대한 오류는 본인도 언제나 의식하고 있으며, 혹여나 글 안에서 그러한 오류가 발견된다면 기탄없는 지적을 부탁드린다. 그러나 동시에 조직과 현장에 함께하지 않는다 하여 한 명의 대중이 조심스레 내놓는 의견의 합리적 핵심까지 내치지는 않기를 또한 바란다.
1. 강령초안의 의의
이번 강령초안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 나아가 한국 민중 전체에 크나큰 의의를 가진다. 큰 틀에서는 무엇보다도 강령초안 그 자체가 하나의 의의이다. 서론에서도 말했지만 한국 혁사진영이 처음으로 당을 건설하기 위한 로드맵을 제시하고 그것의 현실성을 가시화시켰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향후 한국의 민중운동과 전체 정세에 새로운 장이 열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강령초안의 발표는 그러한 가시화된 현실성이 맺은 결실의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사노위는 조직 내외의 당 건설의 현실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실천적으로 반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번 강령초안의 의의는 그 내용에 있어 두 가지를 명시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혁명적 사회주의 당의 핵심을 이루는 것들로서, 이것들이 결여된 채 강령초안이 제출되었다면 오히려 한국 최초의 혁사당 건설이라는 큰 틀에서의 의의조차 훼손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내외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노위는 그 핵심을 빠뜨리지 않고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주었으며, 그로써 그 자신의 현실성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명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가 그것을 언급한 이래 지금까지 혁명적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부르주아 독재로 보고, 여기에서 계급철폐로 이행하기 위해 진정으로 혁명적인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는다는 전략은 마르크스 당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영향력을 가졌던 공상적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비현실성을 폭로하며 노동계급의 주체적 역할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토대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에 의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말 그대로 난도질을 당해야만 했다.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당의 독재로 타락해 간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 자체로 왜곡되었고, 무수한 서구의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앞다투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내팽개치고 거기에 침을 뱉었다. 이 개념은 현존 사회주의 실험 실패를 필연적으로 만든 논리적 근원으로까지 격하되었으며, 이것을 지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현실성은 살아있다. 자본주의는 알아서 붕괴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코 노동계급의 투쟁을 우회해서 철폐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가 남긴 수 천 년 동안의 계급지배 구조의 잔향은 한 방의 혁명으로 사라질만큼 허약하지도 않으며, 대중에 대한 계몽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폐절될 수 있는 관념의 산물도 아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떨쳐내기 위해서 우리는 단호하게 노동계급과 함께 부르주아로부터 권력을 탈취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사노위 강령초안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명시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첫째, 당의 정치적 원칙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시함으로써 그것을 단순히 학문적 개념에서 정치적 쟁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인 사노위와 만나는 노동대중은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쟁점으로 이끌려 들어오게 되고, 이것은 박제화된 개념에 새로운 대중적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둘째, 당의 대원칙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확립됨으로써 당의 모든 정치적 결정에 혁명적 방향성을 부여할 수 있다. 어설프게 대중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핵심적인 원칙을 숨기는 세력은 언제나 대중은 속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속아 넘어가게 마련이다. 혁명적 핵심이 원칙으로 서 있는 한 비혁명적/반혁명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선택의 입지는 좁아진다. 이는 당의 계급성을 선명히 함과 동시에 당의 정치적 전망을 일관되게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셋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천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주체화를 이루어낼 유일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계급권력이 실재하는 현실에서 지배계급의 독재에 대항한 대항독재를 구상하지 않고서는 결코 대중을 주체로 만들 수 없다. 왜냐면 주체란 정의상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는 자이며, 이 자결권은 권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계급지배의 권력이란 그 자체로 독재적이며, 따라서 대항독재의 현실적 현상형태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에게 권력을 주어 주체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만약 이 개념을 우회한다면 노동계급은 언제까지고 부르주아 독재의 객체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진정한 인민주권의 선결조건이다.
사노위 강령초안은 이러한 의의를 전취함으로써 유의미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세력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나. 이행기 요구의 명시
트로츠키의 이행강령 논의에서 시작한 '이행기 요구'라는 논점은 현대 혁명당에 있어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점차 무르익어 가는 구조적 조건과 이와 유리되어 있는 주관적 조건 사이의 괴리에 대한 인식은 트로츠키가 목도한 20세기 초 파시즘의 형태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이 괴리를 계몽주의적이지 않고 진정 혁명적인 방식으로 뛰어넘기 위한 '목숨을 건 도약'으로서 이행기 요구는 배치된다. 사노위는 강령초안에서 이러한 역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행기 요구는 그 자체로써 사회주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경향인 우편향과 좌편향에 대한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 구조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의 괴리 사이에서 우편향에 빠진 자들은 주관적 조건으로의 후퇴를 외치며, 좌편향에 빠진 자들은 구조적 조건으로의 맹돌을 시도한다. 그러나 전략과 전술의 유기적 배치가 결여된 최소주의와 최대주의는 모두 파멸할 수밖에 없다. 전자는 무르익은 구조적 조건이 올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고 폭주함으로써 나타나는 야만적인 반동을 통해 분쇄될 것이며, 후자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한줌의 모험가들로 고립되어 포위섬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 이행기 요구는 주관적 조건을 구조적 조건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실천적 로드맵을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편향을 극복한다.
따라서 이행기 요구를 명시하느냐 마느냐는 단순히 정치공학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혁명당이 혁명적 원칙의 현실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노위는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이행기 요구를 강령초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이후의 실천에 있어 하나의 로드맵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노동계급과 유리되어 관념으로서의 사회주의에 취해 있는 집단이 아니라 대중의 존재와 의식 속으로 침투할 준비가 된 실천적 당임을 입증했다.
2. 강령초안의 문제점
그러나 강령초안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강령의 본질과 그 기능의 완성도에 있어 주요한 결함이 될만한 한계가 눈에 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점이 기본적인 강령초안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개중에는 전적으로 주체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만은 없는 부분도 내포되어 있다. 게다가 이 글을 쓰는 본인 역시 문제점을 지적할 수만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할 말이 궁색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올바른 답보다는 올바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있듯이, 부족한 본인의 사견이라도 올바른 문제로 귀결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조심스레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해 보겠다.
가. 현 시기 체제 분석에 있어서의 문제점
강령초안은 1장에서 현 시기 자본주의 체제에 관해 논하고 있다. 각 하위 항목에선 일단 첫째로 자본주의 체제의 일반론적인 문제점을 열거하고, 둘째로 현 시기 자본주의의 야만적 현상형태와 그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세계적 저항의 흐름을 추적하며, 마지막으로 한국에 적용된 자본주의 모순의 현상형태를 분석한다. 당의 강령이라는 것이 단순히 공상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하여 전략을 제시하는 것인 한, 강령의 대전제로서 이러한 현실 분석이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노동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당으로서 궁극적인 타격 대상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로 명시한 것 역시 필연적이면서도 또한 필수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것만으로 충분하냐는데 있다. 만약 우리가 19세기부터 반복되어 온 자본주의에 대한 당위적 비난에 천착하여 '선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라면 이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체제의 비합리성을 소리높여 외치고, 그 비합리성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기초로 투쟁하는 유물론자들일 것이다(설마 아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자본주의가 이렇게 나쁘다고 선언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메커니즘이 현 시기 어떻게 관철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 약한 고리가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 우리의 약한 고리를 공격해 오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제출할 필요가 있다. 즉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체제 분석을 넘어선 레짐 분석이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자면, 강령초안에서 당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가 가치법칙의 작동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주요 전략이 무엇인지, 자본 분파 내 가치 재분배 과정은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세계 각 지역은 어떤 관계를 맺어 그 과정을 구현하고 있는지, 여기까지의 일관된 논리 속에서 한국의 위상과 역할 및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낮은 추상 수준에 대한 해명이 없이, 최고 추상 수준인 체제에 관한 논의로부터 곧바로 구체적인 당면 현실에 대한 답을 도출한다는 것은 변증법적 체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이러한 비판을 곡해해서 받아들이지 않길 바란다. 본인은 여기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한계나 착취법칙의 불변성을 의문에 부치고자 함이 아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 당시(마르크스 당시, 혹은 러시아 혁명 당시)의 자본주의와 다르다"로 시작하는 여러 유사-개량주의를 논하고자 함도 아니다. 본인은 다만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보여준 작업의 재현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보편적 본질에 대한 명료한 인식에 기초한다 하더라도, 그 특수한 형태에 대한 인식 역시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약한 고리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이 없이는 당의 전략도 상황에 맞춘 우연성의 돌출일 수밖에 없고,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 없이는 계급대중이 체감하는 매일의 현실에 대해 틀에 박힌 잿빛의 설교밖에 할 수 없다. 당은 이래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 모든 책임을 투쟁 주체들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89년 소련 붕괴 이후 정체되고 관념화된 '좌익 인텔리' 그룹의 책임이 훨씬 결정적이다. 그들이 계급적 관점과의 연계를 폐기해 버린 지금, 사실상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과 80년대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이후 유의미한 레짐 분석의 단초는 전혀 제출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 투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바쁜 동지들에게 되는 대로 이것저것 아무거나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본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굳이 논하는 이유는 첫째, 완성된 형태의 분석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부분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과, 둘째, 체제에 대한 통합적인 관점을 당의 구체적인 전략으로 매개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인만큼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어긋날수록 당내 분열과 논쟁이 심각해질 수 있으니 미리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입장을 통일시켜 갈 준비를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나. 현실사회주의 평가에 있어서의 문제점
21세기 혁명적 사회주의 헤게모니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한때 고귀한 이상을 품었던 자들이 남긴 가장 끔찍한 유산이라는 점에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강령초안은 현실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냉정하게 인정하면서,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규정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한다. 분명 무난하고 필연적인 논리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리 전개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현실사회주의 실패의 원인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구조적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침은 매우 의지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전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건 극복방안도 아니고 제대로 된 답도 아니다. 그냥 적당히 누구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얘기일 뿐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현실사회주의 실패의 원인을 규정하는 부분에서 가장 먼저 강령초안은 이렇게 말한다. "...소련은... 유럽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조건, 낮은 생산력과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 노동자계급 내 선진층이 타격받는 주체역량의 손실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했다." 분명 맞는 말이다. 이어지는 논리도 훌륭하다. "이런 난관 속에서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는 무력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의 직접정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변질, 파괴되었다." "소비에트의 무력화와 당/국가관료층의 지배층(계급)화와 맞물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배정당으로 변질되었다." 분명 20세기 초 소련이 처했던 구조적 요인에서 귀결되는 실패의 과정을 잘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안이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권력(평의회권력)의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인가? 초기 소련 혁명가들이 그걸 몰라서 실패했던 것인가? 분명 위에서는 소비에트가 무력화된 조건에 대해 논하지 않았는가?
세계혁명이라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련이 "유럽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조건"에 처해 있었음을 분명 인식하고 있으면서 "'세계혁명의 관점─노동자 국제주의'에 바탕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다."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초기 소련 혁명가들이 세계혁명의 관점을 몰랐나? 세계혁명의 관점을 고수하고 있으면 세계혁명이 실패하지 않는가? 생산력주의 극복 문제는 또 어떤가?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가 일어나도 우리는 생산력주의를 극복한다는 말만 외치고 있을 텐가?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강령초안을 제출한 당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이건 기본적인 논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실패에 짓눌려 있는 계급대중의 신뢰감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다. 세계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와 노동자계급 내 선진층이 타격받는 주체역량의 손실 같은 조건은 러시아 혁명에 고유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혁명에서든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조건이다. 만약 이런 조건이 있어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조건을 극복할 방법을 얘기해야 하고, 혹은 이런 조건이 이제는 생기지 않는다고 본다면 왜 그러는지, 이런 조건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쓰겠다면 어떻게 손을 쓸 것인지를 논했어야 한다. "이런 훌륭한 원칙을 세우겠습니다"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 이행기 요구에 있어서의 문제점
위에서 강령초안의 의의에 대해 논하면서 이행기 요구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으나, 구체적으로 보면 현재의 이행기 강령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강령초안에 제출되어 있는 이행기 요구의 구체적인 요구 각각은 매우 적절하며,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사회주의자와 당이 반드시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하는 것들이다. 본인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들이 배치되어 있는 논리적인 구조의 문제다.
이렇게 얘기해 보자. 이행기 요구와 최소강령은 어떻게 다른가? 이행기 요구를 배치하면서 분명 당은 최소강령이 이행기 요구와 달리 개량적인 것임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행기 요구는 무엇이 다르길래 개량적이지 않단 말인가? 물론 답은 나와 있다. 개량주의자들의 최소강령과 달리 이행기 요구는 자본주의 철폐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건설이라는 큰 틀의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된다. 즉 이행기 요구는 그 자체로서도 물론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만, 그 이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하나의 전술적 경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강령초안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의 요구는... 투쟁요구(정책대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제출된 이행기 요구의 실제 형태는 그렇지 않다. 사실 (8) 노동자 통제 하의 몰수 국유화, (11) 자본가 폭력에 맞선 정당방위, (12) 총(대중)파업과 민중봉기, (13) 평의회에 기반한 노동자 직접권력 이 네 항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여느 진보정당이나 급진주의 정당의 최소강령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일까?
그것은 이 이행기 요구들이 "어떻게 노동계급과 함께 권력획득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제기 속에서 하나의 일관성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령초안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행기 요구를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지만, 각 요구는 그저 목록으로 만들어져 나열되고 있을 뿐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로서 유기적으로 배치되고 있지 않다. 이행기 요구로 제출된 각 영역이 어떻게 노동계급을 권력주체로 재편성할 수 있을 것이며,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 과정에서 어떻게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동시에 어떻게 적들의 약한 고리를 타격할 것인지, 이에 대한 해명이라는 논리적 흐름 속에 각 구호가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지금의 이행기 요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행기 요구라기보단 당면 현상에 대한 즉자적 구호라는 인상이 짙은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내용적으로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맞다면, 그것을 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전략적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지 그걸 꼭 강령에 그럴싸한 논리로 풀어써야 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반박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이행기 요구에 대한 투쟁과 전략적 관점의 헤게모니 투쟁을 분리시킴으로써 당의 활동을 불구화시킬 우려가 있다. 우리가 이행기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그 각각의 투쟁을 어떻게 전체 전략적 목표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그때의 투쟁을 일단 이기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전망이 소실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행기 요구는 단순히 요구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구체적 삶과 계급의 전략적 목표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연결고리로서 제대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선 그 사이를 매개하는 활동가들 자신이 우선 그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선 우리의 이행기 요구에 있어 '혁명으로 가는 로드맵'이라는 위상을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
3. 결론을 대신하여
이로써 간단하게 사노위 강령초안에 대한 본인의 감상을 정리해 보았다. 개중에는 격하게 찬양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수준 이하라고 비난하고 싶은 것도 있었으나, 본인 자신이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떠들 자격이 있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레 정리했다. 본문 중에 사실관계가 다른 것이나 잘못된 이해에 기초한 내용이 있다면 모두 본인의 불철저함에서 비롯된 것이니 기탄 없이 지적해 주되, 불철저하게나마 열심히 이해하고자 했던 시도만큼은 기껍게 봐주길 부탁드린다.
이러니 저러니 굉장히 많은 말을 했지만, 뭐가 어찌됐건 지금 사노위의 전진이 한국의 모든 혁명적 사회주의자 및 그 지지자들에 있어 극도로 중요한 한 걸음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진정한 노동계급의 당을 건설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동지들에게 본인의 거친 감상이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혹여나 몇 가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동지들의 투쟁의 의미를 깎아내리지는 않을 것이며, 앞으로 그것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면 오히려 더 강고한 당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비록 함께 싸우고 있지는 않지만 이 땅 어디에선가 노동계급 권력을 위해 헌신하고 있을 모든 이에 대한 지지의 뜻을 전하며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건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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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위 자유게시판에 직접 올라가는 글이라 말투가 이렇다.
본인 역시 사노위에 가입은 하지 않았으나, 언제나 열심히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멀리서나마 지지하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강령초안을 읽고 느낀 바를 간단히 적어 보고자 한다.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하지 않는 관념적 지지자로서 항상 가질 수밖에 없는 관념성에 대한 오류는 본인도 언제나 의식하고 있으며, 혹여나 글 안에서 그러한 오류가 발견된다면 기탄없는 지적을 부탁드린다. 그러나 동시에 조직과 현장에 함께하지 않는다 하여 한 명의 대중이 조심스레 내놓는 의견의 합리적 핵심까지 내치지는 않기를 또한 바란다.
1. 강령초안의 의의
이번 강령초안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 나아가 한국 민중 전체에 크나큰 의의를 가진다. 큰 틀에서는 무엇보다도 강령초안 그 자체가 하나의 의의이다. 서론에서도 말했지만 한국 혁사진영이 처음으로 당을 건설하기 위한 로드맵을 제시하고 그것의 현실성을 가시화시켰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향후 한국의 민중운동과 전체 정세에 새로운 장이 열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강령초안의 발표는 그러한 가시화된 현실성이 맺은 결실의 한 단계를 마무리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사노위는 조직 내외의 당 건설의 현실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실천적으로 반박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번 강령초안의 의의는 그 내용에 있어 두 가지를 명시했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들은 혁명적 사회주의 당의 핵심을 이루는 것들로서, 이것들이 결여된 채 강령초안이 제출되었다면 오히려 한국 최초의 혁사당 건설이라는 큰 틀에서의 의의조차 훼손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내외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노위는 그 핵심을 빠뜨리지 않고 훌륭한 결과물을 보여주었으며, 그로써 그 자신의 현실성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명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가 그것을 언급한 이래 지금까지 혁명적 사회주의의 합리적 핵심이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부르주아 독재로 보고, 여기에서 계급철폐로 이행하기 위해 진정으로 혁명적인 유일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는다는 전략은 마르크스 당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영향력을 가졌던 공상적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비현실성을 폭로하며 노동계급의 주체적 역할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토대였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에 의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이 실패로 끝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말 그대로 난도질을 당해야만 했다.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당의 독재로 타락해 간 과정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그 자체로 왜곡되었고, 무수한 서구의 자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앞다투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내팽개치고 거기에 침을 뱉었다. 이 개념은 현존 사회주의 실험 실패를 필연적으로 만든 논리적 근원으로까지 격하되었으며, 이것을 지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현실성은 살아있다. 자본주의는 알아서 붕괴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코 노동계급의 투쟁을 우회해서 철폐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가 남긴 수 천 년 동안의 계급지배 구조의 잔향은 한 방의 혁명으로 사라질만큼 허약하지도 않으며, 대중에 대한 계몽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폐절될 수 있는 관념의 산물도 아니다.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를 떨쳐내기 위해서 우리는 단호하게 노동계급과 함께 부르주아로부터 권력을 탈취하여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사노위 강령초안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명시되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닌다. 첫째, 당의 정치적 원칙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명시함으로써 그것을 단순히 학문적 개념에서 정치적 쟁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인 사노위와 만나는 노동대중은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쟁점으로 이끌려 들어오게 되고, 이것은 박제화된 개념에 새로운 대중적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둘째, 당의 대원칙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확립됨으로써 당의 모든 정치적 결정에 혁명적 방향성을 부여할 수 있다. 어설프게 대중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핵심적인 원칙을 숨기는 세력은 언제나 대중은 속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속아 넘어가게 마련이다. 혁명적 핵심이 원칙으로 서 있는 한 비혁명적/반혁명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선택의 입지는 좁아진다. 이는 당의 계급성을 선명히 함과 동시에 당의 정치적 전망을 일관되게 유지시킬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셋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천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주체화를 이루어낼 유일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계급권력이 실재하는 현실에서 지배계급의 독재에 대항한 대항독재를 구상하지 않고서는 결코 대중을 주체로 만들 수 없다. 왜냐면 주체란 정의상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는 자이며, 이 자결권은 권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계급지배의 권력이란 그 자체로 독재적이며, 따라서 대항독재의 현실적 현상형태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에게 권력을 주어 주체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만약 이 개념을 우회한다면 노동계급은 언제까지고 부르주아 독재의 객체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진정한 인민주권의 선결조건이다.
사노위 강령초안은 이러한 의의를 전취함으로써 유의미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세력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나. 이행기 요구의 명시
트로츠키의 이행강령 논의에서 시작한 '이행기 요구'라는 논점은 현대 혁명당에 있어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점차 무르익어 가는 구조적 조건과 이와 유리되어 있는 주관적 조건 사이의 괴리에 대한 인식은 트로츠키가 목도한 20세기 초 파시즘의 형태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났고, 이 괴리를 계몽주의적이지 않고 진정 혁명적인 방식으로 뛰어넘기 위한 '목숨을 건 도약'으로서 이행기 요구는 배치된다. 사노위는 강령초안에서 이러한 역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행기 요구는 그 자체로써 사회주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경향인 우편향과 좌편향에 대한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 구조적 조건과 주관적 조건의 괴리 사이에서 우편향에 빠진 자들은 주관적 조건으로의 후퇴를 외치며, 좌편향에 빠진 자들은 구조적 조건으로의 맹돌을 시도한다. 그러나 전략과 전술의 유기적 배치가 결여된 최소주의와 최대주의는 모두 파멸할 수밖에 없다. 전자는 무르익은 구조적 조건이 올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고 폭주함으로써 나타나는 야만적인 반동을 통해 분쇄될 것이며, 후자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한줌의 모험가들로 고립되어 포위섬멸될 운명에 처해 있다. 이행기 요구는 주관적 조건을 구조적 조건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실천적 로드맵을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편향을 극복한다.
따라서 이행기 요구를 명시하느냐 마느냐는 단순히 정치공학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혁명당이 혁명적 원칙의 현실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노위는 이러한 점을 놓치지 않고 이행기 요구를 강령초안에 포함시킴으로써 이후의 실천에 있어 하나의 로드맵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노동계급과 유리되어 관념으로서의 사회주의에 취해 있는 집단이 아니라 대중의 존재와 의식 속으로 침투할 준비가 된 실천적 당임을 입증했다.
2. 강령초안의 문제점
그러나 강령초안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강령의 본질과 그 기능의 완성도에 있어 주요한 결함이 될만한 한계가 눈에 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점이 기본적인 강령초안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으며, 개중에는 전적으로 주체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만은 없는 부분도 내포되어 있다. 게다가 이 글을 쓰는 본인 역시 문제점을 지적할 수만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할 말이 궁색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올바른 답보다는 올바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있듯이, 부족한 본인의 사견이라도 올바른 문제로 귀결될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조심스레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해 보겠다.
가. 현 시기 체제 분석에 있어서의 문제점
강령초안은 1장에서 현 시기 자본주의 체제에 관해 논하고 있다. 각 하위 항목에선 일단 첫째로 자본주의 체제의 일반론적인 문제점을 열거하고, 둘째로 현 시기 자본주의의 야만적 현상형태와 그 반작용으로 일어나는 세계적 저항의 흐름을 추적하며, 마지막으로 한국에 적용된 자본주의 모순의 현상형태를 분석한다. 당의 강령이라는 것이 단순히 공상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하여 전략을 제시하는 것인 한, 강령의 대전제로서 이러한 현실 분석이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노동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당으로서 궁극적인 타격 대상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로 명시한 것 역시 필연적이면서도 또한 필수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것만으로 충분하냐는데 있다. 만약 우리가 19세기부터 반복되어 온 자본주의에 대한 당위적 비난에 천착하여 '선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라면 이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체제의 비합리성을 소리높여 외치고, 그 비합리성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지에 대한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기초로 투쟁하는 유물론자들일 것이다(설마 아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자본주의가 이렇게 나쁘다고 선언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메커니즘이 현 시기 어떻게 관철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 약한 고리가 있고, 또 어떤 부분에서 우리의 약한 고리를 공격해 오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제출할 필요가 있다. 즉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체제 분석을 넘어선 레짐 분석이 필요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자면, 강령초안에서 당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가 가치법칙의 작동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채택하고 있는 주요 전략이 무엇인지, 자본 분파 내 가치 재분배 과정은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세계 각 지역은 어떤 관계를 맺어 그 과정을 구현하고 있는지, 여기까지의 일관된 논리 속에서 한국의 위상과 역할 및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등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낮은 추상 수준에 대한 해명이 없이, 최고 추상 수준인 체제에 관한 논의로부터 곧바로 구체적인 당면 현실에 대한 답을 도출한다는 것은 변증법적 체계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이러한 비판을 곡해해서 받아들이지 않길 바란다. 본인은 여기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한계나 착취법칙의 불변성을 의문에 부치고자 함이 아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그 당시(마르크스 당시, 혹은 러시아 혁명 당시)의 자본주의와 다르다"로 시작하는 여러 유사-개량주의를 논하고자 함도 아니다. 본인은 다만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보여준 작업의 재현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의 보편적 본질에 대한 명료한 인식에 기초한다 하더라도, 그 특수한 형태에 대한 인식 역시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약한 고리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이 없이는 당의 전략도 상황에 맞춘 우연성의 돌출일 수밖에 없고,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 없이는 계급대중이 체감하는 매일의 현실에 대해 틀에 박힌 잿빛의 설교밖에 할 수 없다. 당은 이래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부분에 있어 모든 책임을 투쟁 주체들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89년 소련 붕괴 이후 정체되고 관념화된 '좌익 인텔리' 그룹의 책임이 훨씬 결정적이다. 그들이 계급적 관점과의 연계를 폐기해 버린 지금, 사실상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과 80년대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 이후 유의미한 레짐 분석의 단초는 전혀 제출되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 투쟁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바쁜 동지들에게 되는 대로 이것저것 아무거나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본인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굳이 논하는 이유는 첫째, 완성된 형태의 분석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부분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있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과, 둘째, 체제에 대한 통합적인 관점을 당의 구체적인 전략으로 매개하는 중요한 연결고리인만큼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어긋날수록 당내 분열과 논쟁이 심각해질 수 있으니 미리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입장을 통일시켜 갈 준비를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나. 현실사회주의 평가에 있어서의 문제점
21세기 혁명적 사회주의 헤게모니의 가장 큰 장애물이자, 한때 고귀한 이상을 품었던 자들이 남긴 가장 끔찍한 유산이라는 점에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강령초안은 현실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냉정하게 인정하면서, 그것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규정하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설정한다. 분명 무난하고 필연적인 논리 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리 전개에는 중요한 함정이 있다. 현실사회주의 실패의 원인을 논하는 데 있어서는 구조적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침은 매우 의지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전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건 극복방안도 아니고 제대로 된 답도 아니다. 그냥 적당히 누구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얘기일 뿐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자. 현실사회주의 실패의 원인을 규정하는 부분에서 가장 먼저 강령초안은 이렇게 말한다. "...소련은... 유럽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조건, 낮은 생산력과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 노동자계급 내 선진층이 타격받는 주체역량의 손실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했다." 분명 맞는 말이다. 이어지는 논리도 훌륭하다. "이런 난관 속에서 노동자권력인 소비에트는 무력화되었고, 노동자계급의 직접정치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변질, 파괴되었다." "소비에트의 무력화와 당/국가관료층의 지배층(계급)화와 맞물려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배정당으로 변질되었다." 분명 20세기 초 소련이 처했던 구조적 요인에서 귀결되는 실패의 과정을 잘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안이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자권력(평의회권력)의 창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인가? 초기 소련 혁명가들이 그걸 몰라서 실패했던 것인가? 분명 위에서는 소비에트가 무력화된 조건에 대해 논하지 않았는가?
세계혁명이라는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련이 "유럽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라는 조건"에 처해 있었음을 분명 인식하고 있으면서 "'세계혁명의 관점─노동자 국제주의'에 바탕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한다."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초기 소련 혁명가들이 세계혁명의 관점을 몰랐나? 세계혁명의 관점을 고수하고 있으면 세계혁명이 실패하지 않는가? 생산력주의 극복 문제는 또 어떤가?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가 일어나도 우리는 생산력주의를 극복한다는 말만 외치고 있을 텐가?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강령초안을 제출한 당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이건 기본적인 논리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과거의 실패에 짓눌려 있는 계급대중의 신뢰감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다. 세계혁명의 실패와 제국주의의 포위, 내전을 통한 경제력의 붕괴와 노동자계급 내 선진층이 타격받는 주체역량의 손실 같은 조건은 러시아 혁명에 고유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혁명에서든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조건이다. 만약 이런 조건이 있어도 다른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조건을 극복할 방법을 얘기해야 하고, 혹은 이런 조건이 이제는 생기지 않는다고 본다면 왜 그러는지, 이런 조건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쓰겠다면 어떻게 손을 쓸 것인지를 논했어야 한다. "이런 훌륭한 원칙을 세우겠습니다"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다. 이행기 요구에 있어서의 문제점
위에서 강령초안의 의의에 대해 논하면서 이행기 요구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으나, 구체적으로 보면 현재의 이행기 강령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강령초안에 제출되어 있는 이행기 요구의 구체적인 요구 각각은 매우 적절하며, 인민의 호민관으로서 사회주의자와 당이 반드시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하는 것들이다. 본인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들이 배치되어 있는 논리적인 구조의 문제다.
이렇게 얘기해 보자. 이행기 요구와 최소강령은 어떻게 다른가? 이행기 요구를 배치하면서 분명 당은 최소강령이 이행기 요구와 달리 개량적인 것임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행기 요구는 무엇이 다르길래 개량적이지 않단 말인가? 물론 답은 나와 있다. 개량주의자들의 최소강령과 달리 이행기 요구는 자본주의 철폐 및 프롤레타리아 독재 건설이라는 큰 틀의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된다. 즉 이행기 요구는 그 자체로서도 물론 매우 중요한 내용이지만, 그 이전에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하나의 전술적 경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강령초안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우리의 요구는... 투쟁요구(정책대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제출된 이행기 요구의 실제 형태는 그렇지 않다. 사실 (8) 노동자 통제 하의 몰수 국유화, (11) 자본가 폭력에 맞선 정당방위, (12) 총(대중)파업과 민중봉기, (13) 평의회에 기반한 노동자 직접권력 이 네 항목을 제외한 나머지는 여느 진보정당이나 급진주의 정당의 최소강령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왜일까?
그것은 이 이행기 요구들이 "어떻게 노동계급과 함께 권력획득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문제제기 속에서 하나의 일관성을 형성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령초안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행기 요구를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지만, 각 요구는 그저 목록으로 만들어져 나열되고 있을 뿐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로서 유기적으로 배치되고 있지 않다. 이행기 요구로 제출된 각 영역이 어떻게 노동계급을 권력주체로 재편성할 수 있을 것이며,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그 과정에서 어떻게 적들의 공격을 방어하며 동시에 어떻게 적들의 약한 고리를 타격할 것인지, 이에 대한 해명이라는 논리적 흐름 속에 각 구호가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지금의 이행기 요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이행기 요구라기보단 당면 현상에 대한 즉자적 구호라는 인상이 짙은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내용적으로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맞다면, 그것을 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전략적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지 그걸 꼭 강령에 그럴싸한 논리로 풀어써야 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반박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이행기 요구에 대한 투쟁과 전략적 관점의 헤게모니 투쟁을 분리시킴으로써 당의 활동을 불구화시킬 우려가 있다. 우리가 이행기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그 각각의 투쟁을 어떻게 전체 전략적 목표로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그때의 투쟁을 일단 이기는 것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전망이 소실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행기 요구는 단순히 요구 그 자체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구체적 삶과 계급의 전략적 목표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연결고리로서 제대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선 그 사이를 매개하는 활동가들 자신이 우선 그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명료한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선 우리의 이행기 요구에 있어 '혁명으로 가는 로드맵'이라는 위상을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다.
3. 결론을 대신하여
이로써 간단하게 사노위 강령초안에 대한 본인의 감상을 정리해 보았다. 개중에는 격하게 찬양하고 싶은 것도 있었고 수준 이하라고 비난하고 싶은 것도 있었으나, 본인 자신이 그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떠들 자격이 있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레 정리했다. 본문 중에 사실관계가 다른 것이나 잘못된 이해에 기초한 내용이 있다면 모두 본인의 불철저함에서 비롯된 것이니 기탄 없이 지적해 주되, 불철저하게나마 열심히 이해하고자 했던 시도만큼은 기껍게 봐주길 부탁드린다.
이러니 저러니 굉장히 많은 말을 했지만, 뭐가 어찌됐건 지금 사노위의 전진이 한국의 모든 혁명적 사회주의자 및 그 지지자들에 있어 극도로 중요한 한 걸음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진정한 노동계급의 당을 건설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동지들에게 본인의 거친 감상이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혹여나 몇 가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동지들의 투쟁의 의미를 깎아내리지는 않을 것이며, 앞으로 그것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면 오히려 더 강고한 당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비록 함께 싸우고 있지는 않지만 이 땅 어디에선가 노동계급 권력을 위해 헌신하고 있을 모든 이에 대한 지지의 뜻을 전하며 이만 글을 마치고자 한다. 건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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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위 자유게시판에 직접 올라가는 글이라 말투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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