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권리주체와 주권의 형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치이론: 상품형태의 전개와 화폐상품의 등장을 중심으로

1. 서론

   1.1.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의 연구동향 - 국가이론 vs. 이데올로기론
   1.2. 마르크스 정치이론의 연구동향 - 자유주의 비판
   1.3. 연구과제 제시 -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에 내재한 정치적 차원의 재조명 필요

2. 상품교환과 권리주체의 형성

   2.1. 자본주의의 기본 단위로서의 상품과 그에 대응하는 사회적 형태로서의 상품소유자
   2.2. 인간과 물(物)의 대립으로부터 연역되는 권리주체로서의 상품소유자

3. 상품형태의 전개와 정치사회의 형성

   3.1. 상품형태의 전개에 대응하는 상품소유자의 사회 형성 과정
   3.2. 전개된 상품형태에서 나타나는 사회계약의 개념
   3.3. 다수의 권리주체로 이루어진 부르주아적 정치사회의 형성

4. 화폐상품의 등장과 주권의 형성

   4.1. 전개된 상품형태에서 화폐상품으로의 이행
   4.2. 상품소유자에서 화폐소유자로, 권리주체에서 주권자로의 이행


5. 결론

   5.1. 요약 - 마르크스의 부르주아 정치사회 분석은 상품형태의 전개에 대응하는 상품소유자의 사회적 관계 확장에서 찾을 수 있음
   5.2. 향후 연구를 위한 제언 - 상품형태 전개의 다음 단계인 가치이론에 내재한 계급형성 분석 필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잉여좌파
국가의 기관을 선거로 구성하는 체제에 대해, 거듭 되풀이되는...비판 중의 하나는...수가 모든 것을 결정하며, 백치라 하더라도...가장 뛰어난...사람의 의견과...다름없는 비중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며...수는 단지 척도와 비교를 제공할 뿐...부차적인...어떤 것이다. 그렇다면 수로 인해 측정되는 것은 무엇인가? 측정되는 것은 바로...전위들의 의견이 얼마나 유효한가, 그 팽창력과 설득력은 어느 정도인가, 다시 말해 그들의 의견의 합리성의 역사적 타당성과 구체적인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다. ... 사상과 의견은 각 개인의 두뇌에서 자생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전파하며...설득하는 중심이 있기에 존재한다. 그 중심이 사상과 의견을 발전시켜 당대의 현실에 알맞은 정치적 형태로 제기한 것이다. '표'를 센다는 것은 기다란 과정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예식일 뿐이다. ...만약 가치있는 인간들이 되었다는 가설적인 집단이,...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부적격자들이기 때문이거나 그들이 '국민적' 이익의 대표자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 틀림없다...
Posted by 잉여좌파
어설픈 후배놈이 꽤 오래전에 써놓은 묵은 글을 이제서야 읽었다. 조금 뒷북일지도 모르겠지만, 몇 가지 스스로도 글을 쓰며 정리하고 싶은 점이 있어 뒤늦게 트랙백을 단다.

인간 노동이 그 자체로서 가치가 아니며 가치는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Proles의 말은 맞다. 사실 이 부분을 오해하면 상품의 본질에 대해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마르크스가 가치를 '관계 이전에 내재적'이라고 표현할 때의 '관계'와, 사회적 관계로서 가치가 결정된다고 할 때의 '관계'가 서로 다른 것을 지칭하고 있음을 파악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오류이다. 전자의 관계는 상품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의 관계, 즉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우연적이고 개별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이다. 후자의 관계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구성하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따라서 본질적인 관계이다.

이 부분을 망각하고 마르크스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여 가치를 상품 안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적 실체로 여기게 되면 결국 상품 자체의 영속성을 인정하게 된다. 인간 노동이라는 본질적 활동의 영속성에서 상품이라는 특정 사회구성체의 개념에 대한 영속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가치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편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를 관계로 보는 쪽도 결론만 달랐지 거의 유사한 오류를 범하곤 한다. 그들은 가치를 관계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 '관계'의 용법을 전자의 용법, 즉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관계로 오도하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특정한 관계의 '재규정'을 통해 손쉽게 바뀔 수 있다는 환상으로 빠져든다.

"관계에 무관한 선관계적 실체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관계가 가지는 구성적인 힘만을 인정할 것인가?"라는 Proles의 질문은 그래서 공허하다. 선관계적 실체냐, 구성적 힘이냐라는 이분법으로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리를 따라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가치가 이미 존재하는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인정된 것이며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현존재가 가진 현실성, 따라서 긍정성 자체가 파괴되지 않는 한(다른 말로는 극복되지 않는 한) 그것은 실체적이다. 그러나 그 본질상 가치라는 것, 상품이라는 것이 사적 소유권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 계급권력이 창조해낸 사회적 관계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는 건 변하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관계적이다.

결국 가치의 '실체성'을 인정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논리적 전제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고 말한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현실에 실재하는 어떤 대상은 그 자체가 내재적으로 이성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즉 현실적인 것의 현실성을 긍정해야만 모든 논리가 연결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결코 자연적이지 않은, 하나의 정치/사회적 권력관계에 기초한 사회구성체로 보았지만, 동시에 그렇다고 이것이 어느날 한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는 어떤 허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자연적'인 것이 '영속적'이며, '사회적'인 것은 '인위적'이기 때문에 '허구적'이라는 도식은 사실 19세기 부르주아들의 자연철학에서 유래하는, 근거 없는 환상이다. 그들은 오직 자연적인 것만이 존재 가능하다고 말함을 통해 역으로 지금 현재 영속하고 있는 자신들의 권력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든 것 뿐이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논리에선 자연적이건 사회적이건 현실적인 것이 현실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현실성은 특정한 모순을 반드시 배태하며, 그 모순이 극복됨을 통해 대상은 변화한다.

상품의 본질로서의 가치가 품고 있는 성격 역시 이러한 논리의 연속선상에 있다. 상품은 본래 자연적으로 상품이 아니며,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구체적 대상, 즉 사용가치로서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적 소유권과 자유 거래의 권리라는 법적/정치적 관계가 개입하면서 여기에 가치라는 새로운 사회적 개념이 등장한다. 하지만 사적 소유권과 자유 거래의 권리는 그 자체로서 이미 현실성을 획득했으며 그 내적 개념의 정합성과 물질적 기반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따라서 가치라는 개념은 자신의 기반이 제공하는 현실성의 씨앗을 물려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현실성의 씨앗은 바로 현실성 그 자체로 개화하지 않는데, 왜냐면 상품 개념의 낮은 단계에선 이 가치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 형태가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 1장에서 말하고 있는 상품 교환의 제 1형태다. 하지만 이러한 낮은 단계는 그 자신의 개념과 현상태가 가진 모순- 구체적 자연물을 추상적 시간으로 용해하여 보편성을 부여한다는 개념과, 제 1형태의 거래 자체에서 드러나는 구체성 및 우연성이라는 현상태 사이의 모순을 통해 극복되고 변화된다. 이로써 제 2형태, 제 3형태가 전개되고 제 4형태에 이르러 가치는 화폐라는 이름의 완벽한 현존재를 부여받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실체적 이념이 된다.

이 전체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가치는 그 개념의 기반인 자본주의적 관계로부터 현실성의 단초를 받아 자신의 독자적인 과정을 통해 그것을 이념으로 실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 전개의 종결이 될 수 없는 바, 왜냐면 그 기반이 가진 관계적 성격과 독자적으로 실현한 실체적 성격이 여전히 모순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자본주의적 관계가 자본주의 자체의 교란 요인이나 계급투쟁 같은 외부 요인을 통해 흔들릴 때 그 실체가 의문에 붙여지는 것으로 드러난다. 공황이 발생하여 상품교환이 중지되면 분명히 창고에 차고 넘치는 재고들은 상품으로서의 존재를 상실한다. 분명 자연적 재료와 인간 노동이 투여된 이 결과물들이 가치라는 실체를 담지하지 않을 리 없을 텐데 시장은 그들의 가치를 부정한다. 이윤 발생이라는 자본주의적 관계의 제 1 목적과 무관해진 상품들은 그 가치의 실체적 성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본 1장에서 논의되는 상품과 가치의 본질은 관계성과 실체성의 동시성과 모순 자체에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동시적 모순을 이해함을 통해서만 가치법칙의 독자성과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성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본의 독자적 동학을 객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따라서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그로써 그에 내재된 관계적 모순을 타격하여 변증법적 변화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원문의 사소한 몇몇 구절들에 대한 주석을 첨부한다.

"간단히 말하면, 아무리 이 상품이 이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여도 그 주장을 추인하는 것은 구매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매-구매 사이의 '도약'에 이윤과 동시에 순환의 붕괴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 '판매'라는 행위의 도약적 성격에 초점을 맞춘 것은 타당하다. 실제로 이 도약에 실패한 무수히 많은 개별 자본가들이 도태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품'과 '가치'라는, 그 추상 수준이 고도로 높은 가장 본질적 영역을 논할 때는 부적절한 구성이다. 추상 수준이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한데 놓고 보면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불규칙적 운동을 토대로 물리 세계의 4대 힘을 설명하려는 시도와 다를 바 없다. 먼저 추상 수준이 높은 개념의 독자적 개념 전개를 완성시켜 놓고, 그것이 실현되는 보다 낮은 단계로 순차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맞는 순서다.

"내 스스로가 설정한 의미는 언제나 강력한 회의자인 판매자에게 부정당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인 것이다."

-> 이것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대 시점에서 개인적인 것'이다.(추가로, 여기선 판매자가 아니라 구매자가 맞지 않나 싶다) Proles는 상품교환의 제 1형태에서 드러나는 단순상품교환을 모델로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낮은 단계에선 상품과 가치의 사회적 성격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으며, 제 4형태에서 그 실체성이 추인된 이후에야 가치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인정받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사회적인 것을 "매우 독특하면서도 발작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완전히 오류이다. 화폐가 독특하면서도 발작적인가?



마르크스가 자본 1장에 상품에 관한 장을 배치한 이유는 상품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기본 단위이며, 이를 해명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1장의 이해는 어렵지만 중요하며, 상황에 따라서 자본 전체를 오독하는 결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자본을 3~4번 정독한 사람이라도 이 1장만큼은 반복적으로 읽으며 계속 오독의 가능성을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구사한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헤겔 학습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만큼 변증법이라는 논리학은 어렵고 이질적이다. 될 수 있는 한 정신현상학과 법철학 정도는 일독하는 것을 권한다. 본인이 위에서 사용한 여러 개념('개념', '현실성', '이념', '현존재' 등)도 여기서 많이 인용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잉여좌파
내가 존경하고 흠모해 마지 않는 친구가 민주주의, 정확히는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짧은 생각을 썼기에 이런저런 떠오른 생각들을 적어본다.

분명 그의 말마따나, 누가 인민인가를 묻지 않는 민주주의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즉, 인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어원적 규정은 사실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는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껏 학교에서 이 어원적 규정으로부터 이끌어냈던 학생들의 아마추어리즘적 민주주의론은 통째로 사기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누가 인민인가를 묻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그 자체라는 것. 여기에 대해서도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내포된 인민의 개념을 원용할 수 있다. 즉 인민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주어진 생득적, 자연적 주체 개념이 아니라 언젠가 성취되어야만 할 목적적, 구성적 개념이다. 이러한 구성적 개념으로서의 인민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논하듯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며, 정의상으로(in definition) 모든 결정에 대한 최고한도의 배타적 주권을 행사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이러한 인민을 구성하는 것, 즉 '우리가 인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선언하여 관철시키는 것이 모든 것이며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민을 선언하여 그것을 관철시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왜냐면 그 순간 구성된 인민은 정의상으로 우리가 목적했던 민주적 주권을 행사하게 될 테니!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아테네 민주정이 민주적이지 않았다는 내 친구의 논평은 사실상 별 의미 없는 언명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들이 던진 '누가 인민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을 내놓았고, 그 대답에 의해 아테네 인민이 구성되었으며, 그 인민은 그 자체로 민주적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민주적이지 않다'는 시/공간적 외부인의 논평은 말 그대로 참견일 뿐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분명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나친 폭론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렇다. 진짜 폭론이니까.

다시 한 번 최초의 전제를 보자. 누가 인민인가를 묻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그 자체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민주주의란 사실상 인민의 구성 완료가 아닌 인민의 구성 과정이다. 즉 위의 폭론은 누가 인민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인민인가에 대해 '물어서 얻은 답'을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데서 발생한다.

즉 이렇게 본다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누가 인민인가를 묻는 것, 인민에서 배제되는 자들이나 인민 자체의 파편화를 추적하며 지속적으로 인민을 구성하는 것만이 민주주의의 지속성을 담보한다는 진실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 형태와 달리 민주정은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이 결론이다. 이미 구성이 완결된 '인민'에 의한 민주정은 공허하며, 어떻게 표현하면 민주주의의 유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된 민주정은 결국 자신을 구성한 인민 자체를 붕괴시키며,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역사상 수많은 민주정들의 사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단순히 과정적 개념, 운동적 개념에 불과한가? 고대부터 정치사상가들이 희구했던 시스템으로서의 정치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대로 파시즘으로 가는 필연적 경로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단순한 안정적 재생산 사이클이라는 의미에서의 제도화는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적 3분법을 절대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곳에는 백날 찾아봐도 민주주의가 없다. 그렇다고 예측할 수 없는 대중의 역동성에 의존하는 아나키스트의 클리나멘적 구상 역시 민주주의엔 다가가지 못한다. 왜냐면 통제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타이밍에 우발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우리는 정치가 아닌 사고, 내지는 재해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대중의 우발적 역능은 번개처럼 한순간의 폭발력은 있어도 금방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다시 언제 올 지 모르는 때로 유예된다. 문제는 바로 운동의 제도화에 있다.

다시 말해, 누가 인민인가를 묻는 집단지성적 행위를 구조적으로 유인하고 이끌어낼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구조가 무엇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어떤 사회적 자극을 통해 인간을 그렇게 유인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단 한 번 번쩍하고 마는 번갯불도, 잘 만들어진 화덕 깊숙히 넣어져서 겨우 등 덥힐 온기만 내놓는 화덕도 안 된다. 강대한 자연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내어 활용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내는 발전소처럼, 우리는 대중의 역능을 통제하여 그것을 지속적으로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결론을 다시 한 번 검토하자. "누가 인민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 그리고 그 질문의 제기 자체를 영속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이는 민주정과도 무정부와도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영속케 할 수 있는 수단을 탐구하는 것이 현시대 모든 정치학도들의 임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Posted by 잉여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