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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은 여기에


사회당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남한 운동에서는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의회주의 정당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런 구석도 있기 때문에 퍼진 위명이겠지만서도, 그러한 위명이 의회주의에 대한 또다른 형태의 환상을 퍼뜨리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씁쓸해지곤 한다.

그런 사회당에서 노무현 2주기를 맞아 논평을 냈다. 짧은 논평에 대한 짧은 논평을 달아 본다.


사회당 논평은 이렇게 말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삶의 마지막까지 지역주의와 권위주의를 넘어서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도 말한다. "그러나 민주정부 10년 동안 한국 국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고단하기만 했다. 제도적 민주화는 발전했지만, 가난한 국민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의회주의 정당을 견고하게 속박하고 있는 정치와 경제의 이분법이라는 망령이다. "노무현은 사회경제적으로는 과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공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박정희는 정치적으로는 과가 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공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이러한 망령은 제도권 정치, 즉 공식적 국가기구가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존재한다는 일종의 물신화 경향에서 기인한다. 사회체제 내부의 계급관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국가기구의 독자적 메커니즘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그들을 의회주의로 이끄는 동시에 그 독자적 메커니즘을 '정상화'시켰다고 판단되는 노무현에 대한 소위 '추모'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전적으로 오류에 근거해 있다. 그 어떤 제도권 정치도 계급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주의와 권위주의를 넘어섰다고? 과연 1990년대 이후 계급대중에 대한 새로운 파편화 전략 없이 탈권위주의가 이 땅에서 가능했을까? 계급대중 스스로에 의해 낡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지역별 분할 전략에서 새로운 노동귀족론과 중산층론에 근거한 분할 전략으로의 이행이 없었다면 탈지역주의가 이 땅에서 가능했을까?

이 이분법에 근거한 그들이 말하는, 노무현이 발전시켰다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체는 대체 무엇인가? 그 '민주주의'의 개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 "가난한 국민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고 말하면서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이라니, 권리 없는 민주주의라는 이 괴상망칙한 형용모순은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이란 말인가?

제도와 절차의 민주화를 이야기하지만 거기에 민주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경선으로 당대표를 뽑으면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청와대에 기자실이 없어지면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애초에 실질적 민주화 없는 제도적 민주화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성립 가능한 것인지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실질적 민주화의 일부분을 이루는 제도적 특징들을, 마치 신문에서 오려낸 글자로 협박장 만들듯 갖다 붙이는 것을 제한적으로라도 '민주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관계의 일부분을 이루는 행동적 특징들을 폭력적으로 갖다 붙인 스토킹도 '형식적 연애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토대가 되는 사회에서 계급대중의 실질적 권력 획득 없이 민주주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공염불이라는 것을 이들은 모르고 있거나 혹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독립적 국가기구에 권력이 있다고 '상상'하며, 이 상상 속의 권력에 대한 접근 경로를 닦아놓은 것을 '민주화'라고 부른다. 하지만 일찍이 루소가 간파했듯이 주권은 결코 정부를 포함한 특정 개인 혹은 단체의 것이 될 수 없다. 권력은 언제나 집합적 주체에게 귀속되며, 자본주의 현실에서 그것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진동할 수밖에 없다.


백번 양보해서 그들이 말하는 제도와 절차의 민주화를 인정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노무현이 이룩한 절차적 민주화가 그리 대단한가? 근로복지공단에서 한 노동자가 몸에 불을 붙여야 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권리를 절차적으로 보장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말마따나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나? '침략전쟁을 반대'한다고 명시된 저 신성한 헌법을 '국익'이라는 입발림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기고 피를 팔던 것은 절차적으로 대단한 민주화인가?


이 논평에서 가장 역겨운 것은 노무현이 "대통령 재임 시절에 양극화 극복의 필요성을 여러번 언급"했다는 내용이다.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공허한 레토릭을 대단하다는 듯 갖다 붙임으로써, 노무현은 이 글에서 한순간에 '양극화를 극복하려 했으나 방법을 잘못 선택한 인물'이 된다. 하긴 기타를 치고 눈물을 흘리던 아저씨의 진정성을 의심이라도 했다간 혹여 표 하나라도 잃을까 걱정이 되었다면 이해는 간다.

덕분에 사회당은 노무현 정권이 왜 신자유주의적 정권일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그들이 구조적으로 자본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지, 어째서 노동자 계급대중이 부르주아 정치세력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하는지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자리를 자기 손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그 대신 거기에 개인화된 우상을 가져다 놓고 진정성이라는 화환으로 장식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쇠사슬을 꽃으로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꽃과 함께 쇠사슬 자체를 뜯어내어 버리는 것이다.


이 논평을 보는 선진적 계급대중은 이것을 기회로 부르주아 정치세력뿐 아니라 개량주의/의회주의 세력에 대한 환상도 벗어던져야 한다. 그들이 얼마나 뼛속까지 자신들의 무대 - 공식적 국가기구 - 와 우리의 삶의 현장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는지 명백히 깨우쳐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유일한 대안은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유기적으로 권력을 정립할 혁명적 계급정당을 건설하는 것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염원이 이루어지는 날, 우리가 경기장 이편에 있을 때 저들은 노무현의 영정과 함께 경기장 저편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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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잉여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