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序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재보궐 선거가 드디어 끝이 났다. 무소속이자 야권 통합 후보로서 상당한 바람을 일으킨 박원순은 결국 그 바람을 타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데 성공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반대투표로부터 안철수 신드롬, 나꼼수 열풍 등을 거쳐 여기까지 온 소위 '민주개혁세력'들은 지금쯤 오랜만의 승리에 한껏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의 종료가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한 후보의 승리에 그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가시적인 몇몇 명망가들의 말잔치와 제스처의 기저에 깔린, 보다 본질적인 정치적 흐름의 연장선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의 승리는 그 흐름의 정치적 중요성과 생명력을 입증하는 하나의 중간결산에 불과하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에서 박원순의 승리가 입증한, 2011년 하반기를 지배했던 정치적 흐름의 본질적인 의미를 규정하고, 이에 근거해 그 의의와 앞으로의 영향, 향후 전망과 좌파의 대응에 대해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아직 사태의 전말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시도되는 초벌적 논의이니만큼, 본문의 분석과 예측에는 실제와 다른 점이나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필자 자신에게 있으며, 기탄없는 지적과 반박을 바란다.
1. 2011 하반기의 계급정치: 중산층 정치의 재도약
2011년은 현 정권에게 있어 악몽같은 해이다. 반값 등록금 운동으로 피어오른 소위 '반MB' 경향의 불씨는 지난 2008년 촛불정국 이후 다시 한번 자칭 '민주개혁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다. 관악, 명동, 강정, 영도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의 불씨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성장한 반MB 불길은 여름 서울을 강타한 대홍수로 다시 한 번 탄력을 받았고, 이에 연달아 터진 무상급식 논란은 결국 서울시장 재보선으로 이어졌다.
이상의 흐름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상 2011년의 주요 정치적 사건과 흐름은 일관된 하나의 흐름 속에 포섭되어 있다. '반MB'라는 단순한 구호로 대표되는, 현 정권과 집권여당 및 그 기반 세력에 대한 반감에 기초한 대항 세력의 결집 및 주도권 획득이다. 그렇다면 이 대항 세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선거가 끝난 지금, 사람들은 20~40대의 박원순에 대한 높은 지지율과 단 4개 구를 제외한 모든 구에서 나타난 박원순의 우위 등을 들어, 그 기반이 '범국민적'이었다거나 '시민'이었다거나, 혹은 '세대투표'라거나 하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원순 당선으로 한 차례 매듭을 지은 이 대항 세력 결집의 정체는 결코 국민도, 시민도, 특정 세대도 아니다. 현 시기 급성장하고 있는 이 흐름은 다름아닌 중산층 정치의 재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역들은 다름아닌 도시 신 중간계급, 즉 대기업의 중견관리직, 의사/교사/변호사 등의 전문직, 중상급 공무원, 중간계급 이상 계층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자영업자 등이다.
어떻게 하여 그렇게 볼 수 있는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근래의 정세를 검토해 보자. 반값 등록금, 비정규직, 철거, 대홍수, 무상급식 등의 의제는 모두 현 집권 세력의 무능함과 반민중적 성격을 명백히 폭로하는 의제였음에 틀림없다. 이 의제들의 확장은 분명 집권 세력과 지배계급의 도덕적 헤게모니를 뒤흔드는 데 기여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대중적인 조롱 - 오세이돈, 전지적 가카시점, 실질적 승리 등 - 의 언술이다. 게다가 유럽발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한국의 부르주아 지배체제에도 균열을 발생시켰다. 2008년 하반기부터 2010년까지 후퇴를 강요받았던 민중운동 및 계급투쟁 전선도 올해 들어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전국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요구와 갈등은 지배계급의 무능을 지속적으로 폭로했고, 한국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계급을 대표할 수 있는 선도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상실이 자동적으로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 확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불황기의 노동자 계급 운동은 방어적으로 짜여지는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며, 이는 현재 한국에서도 과거 확보했던 단체교섭권이나 노동조건, 고용 안정성을 '지키려는' 운동이 주를 이루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피지배 계급도 적극적으로 헤게모니를 확장할 수 없으며, 대항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의제들은 하나의 자기 긍정적 로드맵이 아닌, 파편화된 부정적 언술의 총합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이 중산층 정치이다. 기본계급 양쪽의 힘이 모두 충분하지 못해 나가떨어져 있을 때, 이 하이에나 같은 무리는 잽싸게 주인 잃은 왕홀을 가로챈다. 과거 노무현 열풍으로 그 존재를 각인시키고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등장했으나, 이후 대선 패배와 2008 촛불정국의 패배로 한풀 꺾였던, 이 프티 부르주아 계급의 현대적 핵심이 다시 재기하게 된 것이다.
이 자립성 없는 계층에게 그들 자신의 것으로 주어진 것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작고 유아적(惟我的)인 세계뿐이다. 부르주아의 강철 통치 하에서 자신들의 작은 토끼굴 같은 터전을 위협받는 그들은 힘빠진 지배계급을 맹렬히 물어뜯는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터전이자 세계 그 자체인 그 작은 토끼굴을 절대화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것을 위협하는 행태에 대한 공격은 다른 무엇보다도 도덕적 비판으로 나타난다. 허나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이 계급은 스스로 자기 계급의 대중운동을 건설하기보단, 누군가 가만히 있는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대변해주길 원한다. 이상의 특징들이 중산층 정치의 핵심적인 요소를 구성하게 된다.
2. 현 시기 재도약의 특징과 이전 시기의 부르주아 정치와의 차이점
이러한 중산층들의 결집은 자신들의 유아성과 개인성을 동시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언술 및 개인의 등장으로 촉발된다. 안타깝게도, 이들에게 필요한 그 언술을 제공한 주체는 다름아닌 민중운동 진영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상대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퇴기에 놓인 노동자 계급은 파편화된 부정적 언술을 통해 자신을 방어한다. 이 언술의 특징은 자신의 독자적 가치를 긍정함보다 보편적 가치에서 배제됨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후퇴기에 노동자 계급이 공격받는 영역이 갖는 보편성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타당하고 또 일견 효과적이지만, 보편성의 요구는 대항 주체의 범주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에 따라 그 언술의 형태도 보편성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지배계급의 비도덕성이 전면에 배치되게 된다. 이 모호성의 빈 자리에 약삭빠르게 끼어들어오는 것이 바로 중간계급이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에 의해 폭로된 지배계급의 비도덕성을 전유하여 자신들의 도덕적 언어 체계를 확장한다. 이러한 언어 체계는 중간계급의 문화적 아비투스에 의해 두 모순적인 갈래로 표출되는데, 하나는 자신들의 개별적 도덕성을 공허한 미사여구로 과시하고 공유하는 스노비즘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자신 이외의 도덕적 파탄을 저속하면서도 휘발성 강한 비속어로 조롱하며 즐기는 키치즘의 형태로 드러난다. 중산층의 스노비즘과 키치즘은 동전의 양면이며, 둘 모두 자기 세계의 절대성에 대한 유아적 확신과 집합적 사상의 결여에 기초해 있다. 인터넷과 SNS에서 안철수와 박원순을 찬양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고상한 어투로 정의를 부르짖다가 돌연 반대파에 대한 욕설과 수준 낮은 조롱에 몰두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또 사회의 기본계급이 아닌 이들은 계급적 독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들만의 정치 세력을 건설/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 없음을 메꾸고 은폐하기 위해 개인 숭배가 이루어진다. 새로이 등장한 정치 아이돌에 대한 숭배와 간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광적이었고, 안철수와 박원순은 그 자신들의 고매한 도덕성에 의거해 '한줌의 꼴통들을 제외한 모두'를 '대리'할 수 있는 구원자로 호명되었다.
이러한 중산층 중심의 정치적 결집은 안정된 부르주아 지배와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째, 부르주아 지배는 노동자 계급 정치를 억압하고 그 위에 군림하지만 중산층 정치는 노동자 계급 정치를 전유하고 기만한다. 왜냐면 앞서 언급했듯이 중간계급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추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번 흐름을 타면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도 있지만, 실제 국가를 움직이기 위한 추동력을 얻기 위해선 끊임없이 민중에게 구걸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시기 노동자 계급 정치는 반격과 사수의 전술보다도 의제 설정 주도권에 더 집중해야 한다.
둘째, 부르주아 지배는 자본주의 체제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움직이지만 중산층 정치는 파괴적인 불안정성을 불러온다. 부르주아 지배의 근간은 자본주의 체제의 법칙적 작동에 있지만 중산층 정치는 거꾸로 그 법칙의 교란에 지배의 근간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적이고 단일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중간계급은 끊임없이 두 기본계급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러한 중간계급이 레짐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진동 자체가 영속화하고 제도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을 강제하는 단일한 대중적 기반도, 자기 긍정적 원칙도 없는 이들은 그때그때의 임기응변과 공허한 선언에 휩쓸려 다닌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어디에서나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것은 당선 이후 현재까지의 오바마 미 행정부의 행태만 검토해도 일목요연한 점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산층 정치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에 속해 있으며, 아무리 입으로는 지배계급을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결국 지배계급을 강화하는 경향성을 띠게 된다. 그들의 무능함은 그들 자신의 지배를 가능케 한 자본주의 교란이 불러오는 다른 문제들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게 하며, 따라서 그들은 그 해결을 위해 다시 부르주아에 기대기 때문이다.
3. 현 시기에 있어서 중산층 정치가 구성된 구체적 형태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토대로 다시 구체적인 면면을 살펴보자. 박원순의 승리에 연결된 현실에서의 흐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안철수/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정치 아이돌의 등장, '나꼼수'를 중심으로 한 스노비즘과 키치즘의 유통, 기존 정치세력의 재편을 통한 대리주의 지원 기지의 형성.
안철수/박원순이 정치 아이돌로 부상하면서 짊어진 중간계급의 욕망은 '유능한 성군'에 대한 욕망이다. 과거 노무현 정권을 통해 한 번 몰락을 경험한 중간계급은 더이상 무능한 성군은 통용되지 않음을 학습했다. 물론 여기서의 유능/무능이란 자본주의적으로 형성된 개념인데,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 '부르주아적' 형태와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 자본의 화신으로 표상하는 부르주아의 유능함이란 냉정한 결단과 이윤의 극대화에 있지만, 자기 가정보다 더 큰 세계는 알지 못하는 이 동굴쥐 계급에게 있어 유능함이란 바로 아버지로서의 유능함, 가장으로서의 유능함에 다름 아니다. 즉 안철수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중간계급의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번 동시에 그 돈을 자기 식구들에게 잘 나눠주었고 나아가 아이들에게 모범적이고 존경받는 아버지로서도 행동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적 모델링은 곳곳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데, 예를 들어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가족을 부양하고자 하는 노력을 모르고 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자식은 '후레자식'으로 호명된다. 가족적 세계관의 틀 내에선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서로간의 믿음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모는 선거운동 기간 박원순을 비판하는 좌파들에 대한 맹렬한 물어뜯기로 주로 드러났는데, 장기적으로 이 경향이 집권까지 갔을 경우 이것은 더 파괴적인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 전국 재보궐 선거에서 보면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을 제외한 나머지 선거구에선 여당이 대부분 승리했다는 것인데, 이는 지방의 후진성이나 고연령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 정치인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중산층 정치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면 스타 정치인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 중간계급의 '대표성', 즉 스스로 이 정치체 내에서 보편성을 담지함을 주장할 수 있는 환상의 근거를 받쳐주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젊은이들과 서민들이 던진 박원순에 대한 지지는 사실상 4~50대 중산층이 제작/유포한 박원순의 환상적 보편성에 대한 지지이다. 중산층 그 자신에게는 결코 이러한 보편성을 환상적으로나마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대리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나꼼수'가 대표하는 스노비즘과 키치즘의 대량 유통은, 그 근거가 불안한 중간계급 헤게모니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재승인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이 방송에서 출연진은 계속 욕을 입에 올리며 소위 '꼴통'들의 지성과 도덕성의 결여를 조롱하는데, 이처럼 가벼운 형태로 대량 생산된 저속함이야말로 키치의 핵심 요소이다. 이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하층계급의 저속함과 구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어 걸쳐지는 액세서리로서의 저속함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키치즘은 스노비즘에 딸린 액세서리가 된다. '나꼼수'를 소비하는 중산층은 감자칩 같은 자극적인 언사들을 들으며 그 언사의 대상과 언사 자체의 저속함을 동일시하고, 그를 통해 대비적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확인한다. 즉 누군가 그를 개새끼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개새끼라는 말의 저속함에 어울릴만한 저속한 인간이란 뜻이고 그것은 나와의 수준 차이를 드러내 준다는, 실로 스노비즘적 자의식이 작동하는 대표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개인 숭배와 도덕주의 확산을 통해서만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데, 이 제도권 권력으로의 가교 역할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소위 '범야권', 즉 기존 정치세력이다. 새로운 중간계급 운동은 기존 정치세력을 입맛대로 재편했는데,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민주당의 당내 재편이다. 민주당이 올해 들어 부쩍 진보진영과 민중진영에 러브콜을 늘리고, 정동영이 이곳 저곳을 쑤시고 돌아다니는 것은 결코 단순한 정치공학적 계산도 주체의 주관적 결정도 아니다. 본디 하층 부르주아와 중상층 프티 부르주아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던 당내에서 정치적 주도권이 후자로 넘어가는 과정의 필연적 귀결이다. 완전한 부르주아 정당도 프티 부르주아 정당도 아닌 민주당의 모호한 스탠스는 그들의 모순적 행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주도권 경쟁이 이루어져도 결코 한쪽이 당내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인데,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무능함에 직면했을 때 다시 부르주아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도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진보정당 진영의 재편이다. 민중진영에서 전유한 도덕적 언사를 이용해 결집한 중산층 세력은 손쉽게 진보정당의 도덕성 자체까지도 전유했다. 진보정당들이 제도권 정치에서 자신들을 보수정당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던 유일한 언어 체계를 탈취당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당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독자적인 기반으로서의 민중운동에 대한 유기적인 결합력이 부재할 경우 더더욱 그렇다. 사실 민중운동 부문과의 유기성이 없는 진보정당이란 애초부터 하층 프티 부르주아 중심의 정당이자 도덕정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대 진보정당의 박원순 선대위 참여와, 당선 이후 범야권 통합론의 확산 등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재편을 통해 중산층 정치는 자신들을 대리해줄 누군가를 이중 삼중으로 쌓아올린다.
4. 結
이쯤에서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1 하반기 계급정치 정세에서 나타나는 흐름은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일보후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방어적 스탠스, 그 사이에 끼어들어온 신 중간계급 헤게모니의 재도약.
향후 정세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제아무리 고명한 정치학자라도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지만, 많은 오류의 여지를 인정하며 개인적인 전망을 밝히자면 이렇다. 이번 박원순 당선을 통해 중산층의 결집은 유례 없이 강고해졌고, 이 결집이 확산시키고 있는 헤게모니는 분명 단시간 내에 무너지진 않는다. 내년 하반기까지 큰 스캔들이 터지지 않는 이상 정세는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그때까지 모든 정치적 결정이 중간계급의 입맛에 맞게 이루어질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상 여전히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 있는 부르주아 세력을 실시간으로 끌어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재도약을 통해 형성된 세력이 큰 굴곡 없이 강화 일로를 걷게 될 것이며 여론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번 박원순 선대위에 참여한 진보정당들은 원칙을 저버린 야합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주도권이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간 이상, 이 헤게모니가 완전 붕괴할 때까지 진보정당들은 이 세력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진보정당만의 독자적 도덕 언술 체계는 사실상 소멸했으며, 중산층 정치를 우회한 대중적 정당운동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진보신당의 경우 새로 대표 후보에 출마한 홍세화를 중심으로 일신이 가능할지 주목되긴 하나, 이 역시 내적 일신에 역량이 소모될 것이며 진보정당운동 전체는 10년 전으로 후퇴함이 거의 필연적이다.
2012 하반기까지 중산층 결집을 붕괴시킬 큰 도덕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보면 다음 대선까지도 대세는 거의 넘어왔다고 볼 수 있다. 현 집권세력은 아마 그 도덕적 위기를 불러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덕적 위기가 실제로 찾아오거나, 혹은 이후 그들이 형성할 후속 전선에서 주요한 정치적 패배를 맞을 경우 이 결집은 형성될 때보다 더 빠르게 붕괴할 수 있다. 이 붕괴의 시점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겠느냐, 어떤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도 노동자 계급 정치에 있어선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후 좌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독자적 계급투쟁 전선의 강화. 둘째, 지성주의와 노동자 계급 언술 체계의 확장. 셋째, 확고한 당 건설 사업의 가시화. 첫째와 셋째에 해당하는 내용은 굳이 외부의 지지자일 뿐인 필자가 언급하지 않아도 현장의 활동가들이 더 잘 알 부분이라 생략하겠다. 둘째 내용만 조금 부연하자면, 일단 현재 노동자 계급 정치의 방어적 전술을 구성하는 도덕적 언술을 전술에서 배제할 필요가 있다. 아직 힘이 충분치 않은 노동자 계급을 기존의 권위로 쉽게 압도하는 중간계급의 스노비즘과 키치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양면 언술 체계가 필요하다. 그것은 공허한 스노비즘의 정체를 까발리는 지성주의적 언술과, 상품으로서의 저속함에 대립하는 삶으로서의 저속함을 담은 노동자 계급 언술이다. 전자를 보다 세련되고 치밀하게, 후자를 보다 친밀감 있고 호소력 있게 다듬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중간계급 헤게모니가 결코 짧지도 않지만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혹시나 그들이 집권이라도 하거나 다수 당이라도 된다면 그들의 몰락은 필연적이다. 책임지지 않는 위치에 있을 때 가장 활발한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 몇 번씩 비판을 반복해가며 역량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실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가 할 일을 그저 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재보궐 선거가 드디어 끝이 났다. 무소속이자 야권 통합 후보로서 상당한 바람을 일으킨 박원순은 결국 그 바람을 타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는 데 성공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반대투표로부터 안철수 신드롬, 나꼼수 열풍 등을 거쳐 여기까지 온 소위 '민주개혁세력'들은 지금쯤 오랜만의 승리에 한껏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의 종료가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한 후보의 승리에 그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가시적인 몇몇 명망가들의 말잔치와 제스처의 기저에 깔린, 보다 본질적인 정치적 흐름의 연장선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의 승리는 그 흐름의 정치적 중요성과 생명력을 입증하는 하나의 중간결산에 불과하다.
따라서 필자는 본문에서 박원순의 승리가 입증한, 2011년 하반기를 지배했던 정치적 흐름의 본질적인 의미를 규정하고, 이에 근거해 그 의의와 앞으로의 영향, 향후 전망과 좌파의 대응에 대해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아직 사태의 전말이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시도되는 초벌적 논의이니만큼, 본문의 분석과 예측에는 실제와 다른 점이나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필자 자신에게 있으며, 기탄없는 지적과 반박을 바란다.
1. 2011 하반기의 계급정치: 중산층 정치의 재도약
2011년은 현 정권에게 있어 악몽같은 해이다. 반값 등록금 운동으로 피어오른 소위 '반MB' 경향의 불씨는 지난 2008년 촛불정국 이후 다시 한번 자칭 '민주개혁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성공했다. 관악, 명동, 강정, 영도에서 일어난 계급투쟁의 불씨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성장한 반MB 불길은 여름 서울을 강타한 대홍수로 다시 한 번 탄력을 받았고, 이에 연달아 터진 무상급식 논란은 결국 서울시장 재보선으로 이어졌다.
이상의 흐름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상 2011년의 주요 정치적 사건과 흐름은 일관된 하나의 흐름 속에 포섭되어 있다. '반MB'라는 단순한 구호로 대표되는, 현 정권과 집권여당 및 그 기반 세력에 대한 반감에 기초한 대항 세력의 결집 및 주도권 획득이다. 그렇다면 이 대항 세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선거가 끝난 지금, 사람들은 20~40대의 박원순에 대한 높은 지지율과 단 4개 구를 제외한 모든 구에서 나타난 박원순의 우위 등을 들어, 그 기반이 '범국민적'이었다거나 '시민'이었다거나, 혹은 '세대투표'라거나 하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원순 당선으로 한 차례 매듭을 지은 이 대항 세력 결집의 정체는 결코 국민도, 시민도, 특정 세대도 아니다. 현 시기 급성장하고 있는 이 흐름은 다름아닌 중산층 정치의 재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주역들은 다름아닌 도시 신 중간계급, 즉 대기업의 중견관리직, 의사/교사/변호사 등의 전문직, 중상급 공무원, 중간계급 이상 계층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자영업자 등이다.
어떻게 하여 그렇게 볼 수 있는가? 이를 해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근래의 정세를 검토해 보자. 반값 등록금, 비정규직, 철거, 대홍수, 무상급식 등의 의제는 모두 현 집권 세력의 무능함과 반민중적 성격을 명백히 폭로하는 의제였음에 틀림없다. 이 의제들의 확장은 분명 집권 세력과 지배계급의 도덕적 헤게모니를 뒤흔드는 데 기여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대중적인 조롱 - 오세이돈, 전지적 가카시점, 실질적 승리 등 - 의 언술이다. 게다가 유럽발 금융위기에 따른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한국의 부르주아 지배체제에도 균열을 발생시켰다. 2008년 하반기부터 2010년까지 후퇴를 강요받았던 민중운동 및 계급투쟁 전선도 올해 들어 다시 반격을 시작했다. 전국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요구와 갈등은 지배계급의 무능을 지속적으로 폭로했고, 한국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계급을 대표할 수 있는 선도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상실이 자동적으로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 확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불황기의 노동자 계급 운동은 방어적으로 짜여지는 경향이 강하게 작용하며, 이는 현재 한국에서도 과거 확보했던 단체교섭권이나 노동조건, 고용 안정성을 '지키려는' 운동이 주를 이루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피지배 계급도 적극적으로 헤게모니를 확장할 수 없으며, 대항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의제들은 하나의 자기 긍정적 로드맵이 아닌, 파편화된 부정적 언술의 총합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이 중산층 정치이다. 기본계급 양쪽의 힘이 모두 충분하지 못해 나가떨어져 있을 때, 이 하이에나 같은 무리는 잽싸게 주인 잃은 왕홀을 가로챈다. 과거 노무현 열풍으로 그 존재를 각인시키고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등장했으나, 이후 대선 패배와 2008 촛불정국의 패배로 한풀 꺾였던, 이 프티 부르주아 계급의 현대적 핵심이 다시 재기하게 된 것이다.
이 자립성 없는 계층에게 그들 자신의 것으로 주어진 것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작고 유아적(惟我的)인 세계뿐이다. 부르주아의 강철 통치 하에서 자신들의 작은 토끼굴 같은 터전을 위협받는 그들은 힘빠진 지배계급을 맹렬히 물어뜯는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터전이자 세계 그 자체인 그 작은 토끼굴을 절대화하는 이들에게 있어, 그것을 위협하는 행태에 대한 공격은 다른 무엇보다도 도덕적 비판으로 나타난다. 허나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이 계급은 스스로 자기 계급의 대중운동을 건설하기보단, 누군가 가만히 있는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대변해주길 원한다. 이상의 특징들이 중산층 정치의 핵심적인 요소를 구성하게 된다.
2. 현 시기 재도약의 특징과 이전 시기의 부르주아 정치와의 차이점
이러한 중산층들의 결집은 자신들의 유아성과 개인성을 동시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언술 및 개인의 등장으로 촉발된다. 안타깝게도, 이들에게 필요한 그 언술을 제공한 주체는 다름아닌 민중운동 진영이다. 이러한 현상 역시 상대적으로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퇴기에 놓인 노동자 계급은 파편화된 부정적 언술을 통해 자신을 방어한다. 이 언술의 특징은 자신의 독자적 가치를 긍정함보다 보편적 가치에서 배제됨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후퇴기에 노동자 계급이 공격받는 영역이 갖는 보편성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타당하고 또 일견 효과적이지만, 보편성의 요구는 대항 주체의 범주를 모호하게 만든다. 이에 따라 그 언술의 형태도 보편성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지배계급의 비도덕성이 전면에 배치되게 된다. 이 모호성의 빈 자리에 약삭빠르게 끼어들어오는 것이 바로 중간계급이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에 의해 폭로된 지배계급의 비도덕성을 전유하여 자신들의 도덕적 언어 체계를 확장한다. 이러한 언어 체계는 중간계급의 문화적 아비투스에 의해 두 모순적인 갈래로 표출되는데, 하나는 자신들의 개별적 도덕성을 공허한 미사여구로 과시하고 공유하는 스노비즘의 형태로, 다른 하나는 자신 이외의 도덕적 파탄을 저속하면서도 휘발성 강한 비속어로 조롱하며 즐기는 키치즘의 형태로 드러난다. 중산층의 스노비즘과 키치즘은 동전의 양면이며, 둘 모두 자기 세계의 절대성에 대한 유아적 확신과 집합적 사상의 결여에 기초해 있다. 인터넷과 SNS에서 안철수와 박원순을 찬양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고상한 어투로 정의를 부르짖다가 돌연 반대파에 대한 욕설과 수준 낮은 조롱에 몰두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또 사회의 기본계급이 아닌 이들은 계급적 독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들만의 정치 세력을 건설/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 없음을 메꾸고 은폐하기 위해 개인 숭배가 이루어진다. 새로이 등장한 정치 아이돌에 대한 숭배와 간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광적이었고, 안철수와 박원순은 그 자신들의 고매한 도덕성에 의거해 '한줌의 꼴통들을 제외한 모두'를 '대리'할 수 있는 구원자로 호명되었다.
이러한 중산층 중심의 정치적 결집은 안정된 부르주아 지배와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첫째, 부르주아 지배는 노동자 계급 정치를 억압하고 그 위에 군림하지만 중산층 정치는 노동자 계급 정치를 전유하고 기만한다. 왜냐면 앞서 언급했듯이 중간계급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추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번 흐름을 타면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도 있지만, 실제 국가를 움직이기 위한 추동력을 얻기 위해선 끊임없이 민중에게 구걸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시기 노동자 계급 정치는 반격과 사수의 전술보다도 의제 설정 주도권에 더 집중해야 한다.
둘째, 부르주아 지배는 자본주의 체제의 상승과 하강에 따라 움직이지만 중산층 정치는 파괴적인 불안정성을 불러온다. 부르주아 지배의 근간은 자본주의 체제의 법칙적 작동에 있지만 중산층 정치는 거꾸로 그 법칙의 교란에 지배의 근간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적이고 단일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 중간계급은 끊임없이 두 기본계급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러한 중간계급이 레짐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는 것은 곧 이러한 진동 자체가 영속화하고 제도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을 강제하는 단일한 대중적 기반도, 자기 긍정적 원칙도 없는 이들은 그때그때의 임기응변과 공허한 선언에 휩쓸려 다닌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어디에서나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것은 당선 이후 현재까지의 오바마 미 행정부의 행태만 검토해도 일목요연한 점이다.
물론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산층 정치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에 속해 있으며, 아무리 입으로는 지배계급을 도덕적으로 비난해도 결국 지배계급을 강화하는 경향성을 띠게 된다. 그들의 무능함은 그들 자신의 지배를 가능케 한 자본주의 교란이 불러오는 다른 문제들을 전혀 해결하지 못하게 하며, 따라서 그들은 그 해결을 위해 다시 부르주아에 기대기 때문이다.
3. 현 시기에 있어서 중산층 정치가 구성된 구체적 형태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분석을 토대로 다시 구체적인 면면을 살펴보자. 박원순의 승리에 연결된 현실에서의 흐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안철수/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정치 아이돌의 등장, '나꼼수'를 중심으로 한 스노비즘과 키치즘의 유통, 기존 정치세력의 재편을 통한 대리주의 지원 기지의 형성.
안철수/박원순이 정치 아이돌로 부상하면서 짊어진 중간계급의 욕망은 '유능한 성군'에 대한 욕망이다. 과거 노무현 정권을 통해 한 번 몰락을 경험한 중간계급은 더이상 무능한 성군은 통용되지 않음을 학습했다. 물론 여기서의 유능/무능이란 자본주의적으로 형성된 개념인데,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 '부르주아적' 형태와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 자본의 화신으로 표상하는 부르주아의 유능함이란 냉정한 결단과 이윤의 극대화에 있지만, 자기 가정보다 더 큰 세계는 알지 못하는 이 동굴쥐 계급에게 있어 유능함이란 바로 아버지로서의 유능함, 가장으로서의 유능함에 다름 아니다. 즉 안철수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중간계급의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번 동시에 그 돈을 자기 식구들에게 잘 나눠주었고 나아가 아이들에게 모범적이고 존경받는 아버지로서도 행동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부장적 모델링은 곳곳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데, 예를 들어 아버지가 최선을 다해 가족을 부양하고자 하는 노력을 모르고 아버지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자식은 '후레자식'으로 호명된다. 가족적 세계관의 틀 내에선 어디까지나 최선을 다한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서로간의 믿음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모는 선거운동 기간 박원순을 비판하는 좌파들에 대한 맹렬한 물어뜯기로 주로 드러났는데, 장기적으로 이 경향이 집권까지 갔을 경우 이것은 더 파괴적인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번 전국 재보궐 선거에서 보면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을 제외한 나머지 선거구에선 여당이 대부분 승리했다는 것인데, 이는 지방의 후진성이나 고연령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 정치인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중산층 정치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냐면 스타 정치인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는 중간계급의 '대표성', 즉 스스로 이 정치체 내에서 보편성을 담지함을 주장할 수 있는 환상의 근거를 받쳐주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젊은이들과 서민들이 던진 박원순에 대한 지지는 사실상 4~50대 중산층이 제작/유포한 박원순의 환상적 보편성에 대한 지지이다. 중산층 그 자신에게는 결코 이러한 보편성을 환상적으로나마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대리자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나꼼수'가 대표하는 스노비즘과 키치즘의 대량 유통은, 그 근거가 불안한 중간계급 헤게모니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재승인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다. 이 방송에서 출연진은 계속 욕을 입에 올리며 소위 '꼴통'들의 지성과 도덕성의 결여를 조롱하는데, 이처럼 가벼운 형태로 대량 생산된 저속함이야말로 키치의 핵심 요소이다. 이는 삶에서 우러나오는 하층계급의 저속함과 구분되는,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어 걸쳐지는 액세서리로서의 저속함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키치즘은 스노비즘에 딸린 액세서리가 된다. '나꼼수'를 소비하는 중산층은 감자칩 같은 자극적인 언사들을 들으며 그 언사의 대상과 언사 자체의 저속함을 동일시하고, 그를 통해 대비적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확인한다. 즉 누군가 그를 개새끼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개새끼라는 말의 저속함에 어울릴만한 저속한 인간이란 뜻이고 그것은 나와의 수준 차이를 드러내 준다는, 실로 스노비즘적 자의식이 작동하는 대표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개인 숭배와 도덕주의 확산을 통해서만은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데, 이 제도권 권력으로의 가교 역할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소위 '범야권', 즉 기존 정치세력이다. 새로운 중간계급 운동은 기존 정치세력을 입맛대로 재편했는데,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민주당의 당내 재편이다. 민주당이 올해 들어 부쩍 진보진영과 민중진영에 러브콜을 늘리고, 정동영이 이곳 저곳을 쑤시고 돌아다니는 것은 결코 단순한 정치공학적 계산도 주체의 주관적 결정도 아니다. 본디 하층 부르주아와 중상층 프티 부르주아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던 당내에서 정치적 주도권이 후자로 넘어가는 과정의 필연적 귀결이다. 완전한 부르주아 정당도 프티 부르주아 정당도 아닌 민주당의 모호한 스탠스는 그들의 모순적 행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주도권 경쟁이 이루어져도 결코 한쪽이 당내에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인데,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무능함에 직면했을 때 다시 부르주아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것도 이해할 수 있다.
둘째는 진보정당 진영의 재편이다. 민중진영에서 전유한 도덕적 언사를 이용해 결집한 중산층 세력은 손쉽게 진보정당의 도덕성 자체까지도 전유했다. 진보정당들이 제도권 정치에서 자신들을 보수정당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던 유일한 언어 체계를 탈취당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정당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욱이 독자적인 기반으로서의 민중운동에 대한 유기적인 결합력이 부재할 경우 더더욱 그렇다. 사실 민중운동 부문과의 유기성이 없는 진보정당이란 애초부터 하층 프티 부르주아 중심의 정당이자 도덕정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대 진보정당의 박원순 선대위 참여와, 당선 이후 범야권 통합론의 확산 등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현상이었다. 이러한 재편을 통해 중산층 정치는 자신들을 대리해줄 누군가를 이중 삼중으로 쌓아올린다.
4. 結
이쯤에서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1 하반기 계급정치 정세에서 나타나는 흐름은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일보후퇴,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방어적 스탠스, 그 사이에 끼어들어온 신 중간계급 헤게모니의 재도약.
향후 정세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제아무리 고명한 정치학자라도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지만, 많은 오류의 여지를 인정하며 개인적인 전망을 밝히자면 이렇다. 이번 박원순 당선을 통해 중산층의 결집은 유례 없이 강고해졌고, 이 결집이 확산시키고 있는 헤게모니는 분명 단시간 내에 무너지진 않는다. 내년 하반기까지 큰 스캔들이 터지지 않는 이상 정세는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물론 이것이 그때까지 모든 정치적 결정이 중간계급의 입맛에 맞게 이루어질 것이란 얘기는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도상 여전히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 있는 부르주아 세력을 실시간으로 끌어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재도약을 통해 형성된 세력이 큰 굴곡 없이 강화 일로를 걷게 될 것이며 여론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이번 박원순 선대위에 참여한 진보정당들은 원칙을 저버린 야합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주도권이 완전히 저쪽으로 넘어간 이상, 이 헤게모니가 완전 붕괴할 때까지 진보정당들은 이 세력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진보정당만의 독자적 도덕 언술 체계는 사실상 소멸했으며, 중산층 정치를 우회한 대중적 정당운동은 당분간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진보신당의 경우 새로 대표 후보에 출마한 홍세화를 중심으로 일신이 가능할지 주목되긴 하나, 이 역시 내적 일신에 역량이 소모될 것이며 진보정당운동 전체는 10년 전으로 후퇴함이 거의 필연적이다.
2012 하반기까지 중산층 결집을 붕괴시킬 큰 도덕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보면 다음 대선까지도 대세는 거의 넘어왔다고 볼 수 있다. 현 집권세력은 아마 그 도덕적 위기를 불러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덕적 위기가 실제로 찾아오거나, 혹은 이후 그들이 형성할 후속 전선에서 주요한 정치적 패배를 맞을 경우 이 결집은 형성될 때보다 더 빠르게 붕괴할 수 있다. 이 붕괴의 시점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겠느냐, 어떤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도 노동자 계급 정치에 있어선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후 좌파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독자적 계급투쟁 전선의 강화. 둘째, 지성주의와 노동자 계급 언술 체계의 확장. 셋째, 확고한 당 건설 사업의 가시화. 첫째와 셋째에 해당하는 내용은 굳이 외부의 지지자일 뿐인 필자가 언급하지 않아도 현장의 활동가들이 더 잘 알 부분이라 생략하겠다. 둘째 내용만 조금 부연하자면, 일단 현재 노동자 계급 정치의 방어적 전술을 구성하는 도덕적 언술을 전술에서 배제할 필요가 있다. 아직 힘이 충분치 않은 노동자 계급을 기존의 권위로 쉽게 압도하는 중간계급의 스노비즘과 키치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양면 언술 체계가 필요하다. 그것은 공허한 스노비즘의 정체를 까발리는 지성주의적 언술과, 상품으로서의 저속함에 대립하는 삶으로서의 저속함을 담은 노동자 계급 언술이다. 전자를 보다 세련되고 치밀하게, 후자를 보다 친밀감 있고 호소력 있게 다듬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중간계급 헤게모니가 결코 짧지도 않지만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혹시나 그들이 집권이라도 하거나 다수 당이라도 된다면 그들의 몰락은 필연적이다. 책임지지 않는 위치에 있을 때 가장 활발한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 몇 번씩 비판을 반복해가며 역량을 소모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실태를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가 할 일을 그저 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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