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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윤 - <사노위의 실패가 좌파에게 보여 주는 것>, 마르크스21



일단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가능한 비판 지점에도 불구하고 전지윤 씨의 이러한 운동사적 정리는 장기적으로 우리 운동에 매우 소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먼저 언급해야만 하겠다. 언론의 조명을 받지 못하는 좌파 정치운동의 흐름은 아직까지 구전적으로밖에 계승되지 못하고 있으며, 향후 제반 연구를 위한 1차 사료조차 확보하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지윤 씨의 정리는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 구전적 계승에 끼지 못하고 항상 정리된 문서로만 현장에 다가갈 수밖에 없는 주변인으로서 전지윤 씨에게 감사드린다.

사실 과거 사노련계라 할 수 있는 학생운동과 잠시 호흡을 맞췄었고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배 몇과 연락이 닿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외부의 정리를 통해서 전체 흐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은 필자로선 조금은 실망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일이다. 어쨌든 이런 기회가 주어진만큼, 일단 이 글에 초점을 맞추어 주변인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몇 가지 첨언을 해보고자 한다. 본문에서 다루는 내용은 정확히 사노위의 건설과 분열 과정 그 자체가 아니라, 전지윤 씨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 과정의 묘사이다. 외부의 정리 하나에 천착하여 쓰는 것인만큼 실제 사실과 상이한 부분이 있다 해도 양해 바라며, 추가적인 지적과 수정을 부탁드린다.



사노련 다수파와 사노련 소수파, 사노련파와 사노련 이탈파



원문에서 보여주는 사노위 건설부터 '실패'까지의 전 과정은 사실상 사노련이라는 하나의 조직이 지속적으로 분열해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분명 강고한 소수로 통합 세력 내에 침투하여 다수파를 분열시키고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장시켜야 했을 이들이 오히려 역으로 다수파의 벽 앞에서 내분을 일으키는 모습은 차라리 한 편의 채플린 희극이다. 본질적으로 그 성격이 모호한 중도주의자들은 현실적 정세가 급변하지 않는 이상 특별히 큰 난리를 피우거나 서로 물어뜯어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자신들의 확고한 노선을 밀어붙이고자 하는 욕구와 어떻게든 당 건설을 달성해야 한다는 소망이 혼재된 사노련이야말로 출발부터 자기분열적인 조직이었을지도 모른다.

쟁점을 정리하자면 사노련 다수파와 소수파의 분열, 즉 건설 당시의 1차 분열에서 다수파는 사노준의 중도주의와 개량주의적 성격을 문제삼아 사노위 건설에서 발을 빼기로 했고, 소수파는 그러한 다수파의 결정을 '서클주의로의 후퇴'로 규정했다. 실제로 건설 이전 불거지고 있었다고 제시되는 부분들은 정치적으로 절대 사소한 의제들이 아니다. 특히 현장분회 문제는 어찌보면 사노련계의 정치원칙 그 자체와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파는 그러한 차이들을 실제 당 건설 과정 속에서 견인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관점이 파산했는가 아직 그렇지 않은가를 놓고 2차 분열이 일어난다. 강령 통일 과정에서 사노준계와 사노련계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넓어지는 상황에서, 3차 총회 후 사노련계 다수는 사노위 운동의 실패를 선언하고 퇴장했고, 사노련 이탈파는 그들과 결별하여 사노위에 남았다. 이 과정에서 사노위와 결별한 사노련계가 다시 이전의 사노련 다수파와 합쳐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노위 운동이 실패한 것이건 아니건 이로써 그 내부에서 사노련계의 의미란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할듯 싶다.



절박한 욕망 -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분열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정치적 원칙 차원의 갈등이 아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욕망의 차원, 얼마나 더 큰 절박함을 느끼느냐에 따라 나뉘는 차원의 갈등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대상은 노동자 계급정당이다.

왜 사노련계의 분열이 정치적 원칙의 갈등이 아니라고 하는가? 그것은 양차에 걸친 분열 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사실 사노련계 활동가 중 그 누구도 사노준이 중도주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마 사노련의 원칙을 그들이 영 기껍잖아 한다는 것도, 양자 간의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 못할 만큼 본질적인 차이라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련계는 최초 사노위 건설에 동참하겠다고 나섰으며, 그 후에도 두 번이나 내분을 거치며 그 자리에 일부를 남겨두고 왔다. 이러한 과정이 공동전선이나 개량주의 노선에 대한 원칙적 차이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사노련계가 원래부터 급진 좌파 정파 사이의 연합을 통한 당 건설이라는 복안을 갖고 그것을 추구해 왔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필자가 그 활동가들 근처에서 어정거리던 2007~2008 시기까지만 해도 사노련계는 정파연합을 통한 당 건설이라는 구상을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그 비판에는 과거 2005년에 있었던 정파연합 투쟁체의 파국 경험이 짙게 묻어나 있었다(하도 오래 발을 빼고 있었더니 그 투쟁체의 이름이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시는 분은 제보 바란다). 당시에도 노힘-민투위의 배신행위와 관련된 분열로 뜨거운 맛을 본 바, "혁명적 소수가 정치적 원칙을 유지하면서 참을성 있게 계급에 뿌리내리는 과정"(원문 21페이지)이 당 건설의 원칙이라는 점은 사노련계도 충분히 공유하고 있었을 터였다(원문에서 제시하는 '사노련도 원래 정파연합으로 출발했다'는 것은 근거가 아니라 인신공격에 가깝다. 게다가 정파연합으로 정파를 만드는 것과 정파연합으로 당을 만드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위 참가와 그 이후의 분열이 일어난 원인은 결국 그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당 건설을 우선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절박함의 차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 건설의 욕구와 자기 보존의 욕구가 맞부딪히는 장이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현 남한 좌파 정치운동의 현실에서 사노련계가 처한 입지 상 필연적인 것이다. 현장투쟁을 가장 강조하는 정파지만 정작 현장에서 소수파라는 것, 레닌주의적 당 건설을 가장 강조하는 정파지만 정작 당은 없다는 것, 한 당의 소수 분파는 될 수 있을만한 규모지만 자력으로 당을 건설하기에는 모자란 애매한 규모라는 것 등이 추동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현 시기 좌파에게 당 건설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절박함에 젖어 달려온 만큼 이제라도 분명 다시 한 번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냉정하게 생각할 때, 현 시기 좌파에게 있어 당 건설이 가지는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왜 우리는 그토록 당에 매달리는 것이며, 하다못해 사노준 같은 중도주의 조직마저 지금 당장 당을 만드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당이 가지는 의미 그 자체를 자문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것은 본문의 주제도 아니거니와, 이미 필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들 언급해 주었으므로 딱히 여기서 더 첨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묻고자 하는 것은 현 시기 남한 좌파 운동에 있어 당 건설이 가져올 수 있는 효과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배경, 그리고 그 과제의 우선순위다.

사실 사노련을 비롯한 좌파들이 당 건설에 매달리는 이유는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 그것은 부르주아 정당과 개량주의 정당에 대항하여 계급적 세력의 정치적 실체를 사회적으로 공인받고자 하는 욕구이다. 평소 활동에서 만나는 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에게 자신이 그저 일개 노조 서기나 연대 셔틀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의 표현이다. 이러한 절박함은 갈수록 가속화되는 착취와 노동 불안정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치적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계급적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과제의 필요성이 크고 시급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과제가 최우선 당면 과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과제를 풀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도 있다.

사노위 건설 과정에서 보더라도, 현재 남한 좌파 진영이 인정해야 할 차가운 현실은 바로 그 어떤 좌파 정파도 단독으로 당을 건설할 수 있을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사노준조차 다른 정파들에게 손을 벌리는 판국이다(물론 이쪽은 규모보다도 무조건 다른 정파들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멘셰비키적 싸구려 민주주의론이 더 큰 원인이겠지만, 자격이 없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원문 각주에서 "따라서 다함께가 민주노동당에 개입하고 관계 맺는 것은 개혁주의 대중 속에 들어가 작업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혁명조직이라는 것을 뜻할 뿐이고 자랑할 만한 내용일 것이다."(원문 각주 140번) 라며 자화자찬하고 있는(이라고 쓰고 자뻑 쩌네 라고 읽는다) 다함께조차 당 건설의 건 자도 꺼내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오히려 당 건설이라는 과제를 그렇게 신격화할 필요는 없다. 지금 무리하게 계급정당을 건설한다 한들 대체 우리가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당 건설이 가져올 수 있는 효과 - 급진 좌파 정치세력의 사회적 가시화, 투쟁 동력의 결집, 개량주의의 실체 폭로 등 - 는 확실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제대로 당을 건설할 수 있었을 때의 얘기다. 당을 건설할 깜냥도 안 되는 상황에서 레닌의 "당이 필요하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서클을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다 보니 사노위와 같은 '무리수'가 두어지는 게 아닐까.



어떤 활동이 필요한가



물론 '제대로 된 당'이라는 것에 대한 신격화 역시 곤란하다. 사실 레닌 때만 하더라도 사회민주노동당 역시 첫 강령 통일 과정에서 조직론 하나 제대로 통일이 안 되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갈라진 케이스고, 1905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진 제대로 된 영향력은커녕 신문 하나 팔기 힘들었던 것이 볼셰비키였다. 심지어 1917년 10월 혁명의 목전에 가서까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조차 의견통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도력이 이를 겨우겨우 극복했을 따름이다. 통일된 레닌적 전위당이 혁명을 '만든' 케이스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 단지 전위당은 혁명이 올 때 그것을 견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런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고 레닌주의적 당을 이상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면 영영 남한에서 당을 건설하기란 요원할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시점 내에 적절한 역량을 갖추어 적절한 형태로 적절한 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원문 저자인 전지윤 씨는 "이렇게 공동전선을 통해 대중투쟁에 함께하면서 그것을 제대로 일반화해 전체 투쟁의 일부인 각 투쟁을 서로 연결시키려 할 때, 사회주의적 분석과 대안을 투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이용할 때, 그럴 때 사회주의자들은 계급 대중 속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며 혁명정당 건설의 길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쓰고 있다. "노동계급은 학년이 높아지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중단을 혐오하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혁명의식으로 나아간다. 투쟁하기 위해서 노동계급은 단결해야 한다." 라는 트로츠키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투쟁 속에서 당을 만든다'는 낡은 원칙을 되풀이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다함께의 오만과 달리 '투쟁'이 사노련 외 남한 좌파 진영에 부족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공동전선이 능사라는 식의 신격화는 당 신격화보다 더 우스꽝스럽다. 스스로 “당 건설의 방법이 …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라던 클리프의 말을 인용하면서, 1900년대 러시아의 공동투쟁 파트너와 현대 남한에서 상정된 공동투쟁 파트너의 본질적인 차이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투쟁이란 건 일단 투쟁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상대와 하는 것이다. 2005년의 경우처럼 공동투쟁 파트너가 투쟁을 방해한 나머지 악감정만 남기고 실패할 때 공동전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적절한 당'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현실적 목표치를 명확히 해야 한다. 지금까지 남한 좌파 진영의 당에 대한 규정은 항상 이상화된 당에 그쳐 있었다. 실제로 당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재기 위해서라도 현실화된 당의 이미지는 필수적이다. 건설되는 순간 홍길동처럼 조선 팔도를 누비며 모든 노동계급을 구원하고 혁명을 불러올 당 따위는 현실에 있지도 않으며 쓸모도 없다. '적절한' 당이라는 것의 그 적절함을 공개적인 논쟁을 통해 규정함으로써 비로소 그 적절함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도 뚜렷해질 것이다. 그것이 동의가 안 되면 서로 묻어놔도 상관없는 부분을 확실히 하여 진행하는 정파통합이거나, 아니면 약간 역량이 부족해도 일단 형태를 갖추고 시작하는데 의의를 두는 규모 측면에서의 타협이거나 어느 쪽이건, 얼마까지가 '적절하다'는 기준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당의 형태가 아니라도 전개할 수 있는 계급정치 실천 양태를 고민해야 한다. 사실 이 부분은 당 건설 이후에도 중요한데, 왜냐면 이것이 곧 당의 현장분회와 노동자 평의회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출처인 모모 조직처럼이라고까진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노상에서 신문팔이에 나서고 부르주아 언론의 뉴스에 뜨는 사건을 쫓아다니며 피켓팅하는 것만이 정치활동이고 정치투쟁은 분명히 아니다. 하지만 현재 좌파 진영이 제도권 정당과 부르주아 언론의 영역을 해바라기하는 것 이외의 유효한 대안적 정치를 고안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며, 이 때문에 경제주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정치의 본질은 대중의 인민으로의, 따라서 계급으로의 결집에 있음을 이해하고 이로부터 출발하는 현장정치/계급구성의 정치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당을 만드는 과정은 단순히 어떤 제도적 단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곧 계급을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노위 4차 총회를 기다리며



어쨌든 이 사노위라는 실험의 종막은 십여일 후로 다가온 4차 총회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은 사노련 이탈파마저 허무하게 자리를 박차고 뜨느냐, 아니면 떠난 자들을 다시 붙잡을 명분이라도 주느냐는 사실상 사노준계 쪽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건 이미 사노위라는 조직이 '연합'으로서 의미가 있느냐에 대한 신뢰는 흔들렸고, 사노준의 중도주의와 정파패권주의에 대한 불신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서로가 실천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상황도 아니고, 이미 알 것 다 아는 상황에서 불신을 일소하고 조직을 통합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봐도 그런 시도는 거의 대부분 실패해 왔다(나눠먹을 달콤한 떡고물이 있지 않은 이상에야). 게다가 거기에 참여하는 당사자가 뭔가 혼자 해 볼 수 있는 역량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 스스로 영토를 지킬 수 없는 군주가 외국군을 불러들이는 것은 재앙에 불과하다.

현장정치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한 명의 주변인으로서 사노위의 '실패'는 안타까운 소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남한 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표방하는 조직이 생겼다 사라졌음은 분명 큰 의미를 가지며, 아직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당 건설에 대한 의지 역시 꺾이지 않았을 터다. 필자의 헛소리에 가까운 첨언이 우연히라도 작은 힌트나마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언젠가 들려올 역사적인 당 건설의 소식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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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잉여좌파